[이재호 칼럼]우리의 핵무기 삐라

  • 입력 2008년 12월 8일 19시 47분


삐라(전단)는 우리가 가진 핵무기다. 북한에 핵탄두가 있다면 우리에겐 삐라가 있다. 어느 쪽이 셀까. 나는 삐라라고 본다. 핵탄두는 위협이나 억지용으로는 효과가 있지만 실제로 사용하기는 어렵다. 자신도 망할 각오를 해야 하고 주변국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삐라는 그냥 날려 보내면 된다. 파괴력도 어떤 의미에선 핵보다 크다. 북의 살아 있는 신(神),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체제 자체를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김 국방위원장의 신격화(神格化) 정도를 보여주는 단서는 많다. 북 언론은 “전 세계 인민이 김 위원장을 너무도 흠모해 160여 개국에서 무려 1200가지의 호칭으로 부른다”고 보도해 왔다. ‘명장 중의 명장’ ‘불세출의 영웅’ ‘성인 중의 성인’ ‘우리 행성의 수호신’ ‘철학의 거장’ ‘세계적 대문호’ ‘인류음악의 천재’ ‘만민의 하늘’ ‘인류의 태양’ ‘21세기의 태양’ 등으로 추앙된다는 것이다. 거짓말 같지만 북에선 사실로 통한다.

믿기지 않는다면 출생 신화를 보자. 이른바 향도성(嚮導星)의 전설인데 요약하면 이렇다. 1942년 2월, 백두산을 오르던 한 백발노인에게 하늘에서 제비가 내려와 ‘이 자리에서 온 세계를 지배할 비범한 장군이 태어날 것’이라고 알려줬는데, 그 예언대로 그달 16일 백두산 정상에 떠오른 향도성이 정일봉(正日峰) 위로 황홀한 빛을 비추자 김 위원장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무슨 황당한 얘기인가 싶겠지만 북 주민들은 그렇게 믿는다.

김정일 神格化 부숴야 희망 있어

이런 김 위원장을 평범한 인간, 그것도 흠결과 악행으로 얼룩졌으며 2500만 북한 인민을 굶주리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누군가가 까발린다면 어떻게 될까. 더는 체제 유지가 어려울 것이다. 이른바 영도(領導)의 유일중심(唯一中心)이 흔들리면 그를 구심점으로 지탱해온 체제도 흔들린다. 북이 삐라에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그래서다. 올해 남북관계의 급랭 속에서도 북이 굳이 군사실무회담 개최를 먼저 제의하고 나선 것도 삐라 때문이다.

개성관광과 경의선 철도운행 중단, 개성공단 체류인력 감축 등도 마찬가지다. 10월 2일 군사실무회담에서 북한이 “삐라 살포가 계속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위협한 그대로 결행한 데 지나지 않는다. 북이 초강경으로 나오는 것은 이명박 정부를 길들이려는 목적도 있지만 더 직접적인 이유는 삐라에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 일각에선 남북관계가 경색된 책임이 온통 이 정부의 대북정책에만 있는 것처럼 몰아붙인다.

북한은 우리에게 “6·15 남북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의 합의를 이행하라”고 다그치지만 그럴 자격이 없다. 긴 말이 필요 없다. 6·15 선언에 명시된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 약속부터 지키지 않은 게 북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92년 발효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깨고 핵개발을 한 것도 북이다. 그런데도 언필칭 ‘진보’는 북의 주장만 되뇌고 있다.

그렇다고 남북 간 체제경쟁이 끝나 격차가 현격히 벌어진 마당에 북한에 일대일의 엄격한 상호주의를 요구할 수도 없다. 보수 우파도 그쯤은 안다. 우리가 북에 바라는 것은 최소한의 성의 표시다. 금강산 관광객이 피살됐으니 사과 한마디쯤은 하라는 것이다. 그것마저도 안 하겠다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북의 진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좌파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싫은 소리를 해서라도 북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야 한다. 지난 10년처럼 감싸기만 한다면 북이라는 체제는 결국 소멸되고 말 것이다.

核보다 강해서 살포는 신중해야

북한과 좌파가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린다면? 우리도 ‘핵무기’를 쓸 수밖에 없다. 삐라 말이다. 풍선 삐라의 원조격인 기독북한인연합의 이민복 대표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레이더에도 안 잡히는 삐라야말로 북 주민들의 눈과 귀를 열게 할 가장 적절한 수단”이라고 했다. 비닐풍선은 간이 시한폭탄이 달려 터지는 순간을 조절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최대 7kg의 삐라 뭉치를 매단 채 4시간 이상 터지지 않고 평양까지 날아간다고 한다.

다만, 모든 위협은 행동에 옮겨지는 순간 효력을 잃기 때문에 살포는 신중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납북자가족단체와 자유북한운동연합이 5일 삐라 살포를 당분간 자제하기로 한 것은 현명한 결정이다. 그렇다고 삐라를 뿌릴 자유와 용기까지 위축돼서는 안 된다. 담대하되 유연하게 행동한다면 삐라가 북한을 바꿔놓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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