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이회창 씨의 자기 발 밟기

  • 입력 2007년 11월 12일 20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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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다. 그가 두 번의 대선에서 근소한 차로 진 데는 햇볕정책도 한몫했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려면 바람 대신 햇볕을 쪼여야 한다”는 주장은 우화가 아닌 현실에선 입증되지 않은 가설이다. 남북문제는 퍼 준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햇볕정책은 그를 냉혹한 대북 대결주의자로 만들어 버렸다.

햇볕정책에 맞서 이 전 총재가 들고 나온 게 신축적 상호주의(flexible reciprocity)였다. 북에 도움을 주는 만큼 개혁과 개방을 요구하되, 북의 형편을 고려해 가끔은 그냥 도와주기도 하겠다는 것이니, 이게 훨씬 합리적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중의 가슴속을 파고들지 못했다. ‘신축적 상호주의’라는 말 자체가 모호해서 쉽게 녹아들지 못했던 탓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햇볕’은 금방 알겠는데, ‘신축적 상호주의’는 대체 무슨 뜻이냐”고들 했다. 필자는 2004년 2월 17일 당시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초청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이런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용어가 너무 어려우니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쉬운 말로 바꾸라”는 필자의 제안에 최 대표도 공감을 표시했다. 바뀌진 않았지만.

게다가 김대중, 노무현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전 총재를 ‘전쟁세력’으로 몰았다. “북에 상호주의를 하자는 것은 전쟁하자는 것”이라고 공격했다. 이 전 총재로서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햇볕’에 취해 정작 북의 핵 보유를 방조한 사람들이 외려 자신을 대북 대결주의자로 몰았으니 말이다. 이 전 총재는 좌파 특유의 낙인찍기에 당했던 것이다.

李-李, 모두 신축적 상호주의자

그런 이 전 총재가 지난주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대북정책을 문제 삼았다. “내용이 모호하고, 상호주의 원칙을 포기했으며, 대북 지원이 북한의 개혁 개방과 연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근거 없는 주장이다. 이명박 후보의 대북정책은 내용부터가 훨씬 구체화됐다.

핵 문제만 해도 ‘북핵 불능화, 폐기 초기 이행, 핵 폐기 이후’의 3단계로 나누고 단계별 진전에 따라 경제 지원 방안을 논의해 이행토록 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핵 폐기를 대전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전 총재의 정책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상호주의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 후보는 6월 19일 경선후보 대북정책 토론회에서 “햇볕정책의 의도와는 달리 돌아온 것은 핵무기이므로 원칙 있는 포용정책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대북지원이 북의 개혁 개방과 연계되지 않았다”는 이 전 총재의 주장도 수긍하기 어렵다. 지금은 핵 폐기가 급하므로 우선 핵과 연계하는 것이 옳다. 핵만 폐기되면 북은 개혁 개방으로 가게 돼 있다. 처음부터 욕심을 내면 될 일도 안 된다. 그 밖에 크고 작은 대북 지원책도 ‘상호주의’라는 큰 틀을 유지하는 선에서 추진한다면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다.

결국 이 후보는 이 전 총재가 한나라당에 깔아 놓은 ‘신축적 상호주의’의 충실한 계승자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차이를 찾자면 이 후보 특유의 상상력이 가미돼 조금 더 유연해졌다는 것뿐이다. 이 전 총재가 겨우 그 정도를 가지고 이 후보를 ‘짝퉁 햇볕주의자’로 낙인찍는다면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는 꼴밖에 안 된다.

‘미워하면서 닮는다’지만, 두 번의 대선에서 좌파의 낙인찍기에 그렇게 당한 이 전 총재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계승자에게 그걸 되갚으려 해서는 곤란하다. 국가적으로도 불행한 일이다. 그의 출마로 대선판엔 벌써 이념 갈등의 기운이 감돈다. 대선 이슈가 ‘경제’에서 ‘안보’로 바뀌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이번처럼 중요한 선거가 이런 식의 이분법적 선거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피해자인 이 전 총재가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保-保분열론’은 지나친 비약

이 전 총재의 등장을 보수(保守)의 분열, 보-보(保-保) 내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어느 한쪽이 정말 극우 보수이거나, 무책임한 유화주의자라면 극명한 대비를 통해 건전 보수, 합리적 보수의 존재와 가치가 오롯이 드러날 테니 말이다. 실제로 “차제에 이 전 총재를 극우의 중심에 놓고, 그 세력과 단절하자”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 정도는 아니다. 그러기에는 양쪽의 뿌리가 같고 서로 겹치는 부분이 너무 많다. 대권 욕심만 버리면 누구에게도 보이는 이 명백한 사실이 이 전 총재에게만 안 보인다면 이상한 일이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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