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주의(reciprocity)의 사전적 의미는 ‘상대방이 나에게 하는 것만큼 나도 상대방에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미국이 우리 국민에게 입국 심사를 까다롭게 하면 우리도 미국인에게 그만큼 까다롭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상호주의는 모든 국제 관계의 기본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호주의를 ‘하나를 주면 반드시 하나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이해 할 필요는 없다. 상호주의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대칭적 상호주의와 비(非)대칭적 상호주의가 대표적인 예다. 전자가 1 대 1의 주고받기 식이라면 후자는 서로의 형편에 따라 차등을 두는 방식이다. 남북관계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양(量)과 질(質)을 기준으로 나눌 수도 있다. 양의 상호주의보다 질의 상호주의가 더 합리적이겠지만 계량하기 어렵다는 난점이 있다. 적용의 ‘폭’을 기준으로 해서 대(大)상호주의와 소(小)상호주의로 분류하는 학자도 있다. 전자가 큰 틀에서 이뤄진다면 후자는 더 작은 틀에서 이뤄진다.
盧대통령도 충실한 상호주의자
관대함(tolerance)이 기준이 되기도 한다.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만 기왕 주기로 한 것이라면 그냥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다. 속도와 타이밍의 상호주의도 있다. 예컨대 북한에 쌀을 지원할 때 1개월 안에 다 보낼 수도 있고, 6개월간 나눠 보낼 수도 있다. 춘궁기에 줄 수도 있고, 추수기에 줄 수도 있다. 시기는 북의 약속 이행 정도를 고려해 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대북정책은 본질적으로 상호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돼 있다. ‘남북관계(關係)’라는 말 속에 이미 ‘상호(서로)’라는 의미가 내재돼 있다. ‘상호’가 없다면 ‘관계’도 없다. 노 대통령부터 충실한 상호주의자다. 작년 7월 북이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 즉각 대북 지원을 중단한 게 그 증거다. 올 4월 남북 경제협력추진위 회의에서 쌀 40만 t 차관 제공에 합의하고서도 북의 2·13합의 이행 여부를 지켜본다며 3개월이나 끌다가 최근에야 육로로 실어 보낸 것도 그렇다.
결국 상호주의는 다 같은 상호주의인데 노 대통령이 말하는 상호주의는 ‘비대칭에, 좀 더 관대한, 큰 틀에서의 상호주의’이고, 한나라당이 말하는 상호주의는 ‘대칭에, 좀 더 엄격한, 작은 틀에서의 상호주의’일 뿐이다. 노 대통령은 후자를 가리켜 ‘경박한 상호주의’라고 조롱했지만 독선이다. 어떻게 자신의 상호주의만 선(善)이고 상대방의 것은 악(惡)일 수 있는가.
노 대통령은 오히려 엄격한 상호주의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감시와 견제가 없었다면 지난 4년간 북에 지원한 1조4246억 원보다 훨씬 많은 돈과 물자를 북에 퍼 주었을 것이고, 북의 핵무기 보유량도 덩달아 늘었을 것이다. 온돌방이 워낙 냉골이어서 한쪽에선 급히 불을 땠지만, 자칫 장판까지 태워 버릴까 봐 늘 조심하라고 그들이 주의를 줬기에 큰 화재 없이 이만큼 온 것 아닌가. ‘유연하면서도 원칙이 지켜지는 상호주의’가 정책으로서 훨씬 정합성이 있다고 믿는 이유다.
햇볕정책의 허구(虛構)에 비춰 보아도 상호주의는 포기해선 안 된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이솝 우화에서 ‘햇볕정책’을 빌려 왔기에 나도 ‘우화적’으로 얘기하겠다.
햇볕만 쪼이면 통일이 되는가
햇볕, 햇볕 하지만 1년 365일 내내 햇볕이 내리쬐는 것은 아니다. 기상청에 따르면 서울지역 기준으로 지난 10년간 비가 온 날은 연평균 135.1일이다. 여기에다 흐린 날까지 합치면 햇볕이 나는 날은 연중 100일이 채 안 된다. 그렇다면 우산과 장화도 준비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다. 대북정책도 마찬가지다. 언제든 상황에 따라 대응을 달리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상호주의다. 햇볕만 쬐이면 당장 관계가 좋아지고 통일이 되는가. DJ가 국민에게 그런 환상을 심어 주더니, 이제 노 대통령이 오도된 ‘상호주의 포기’를 외치며 그 뒤를 잇고 있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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