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부활하는 레닌의 테제

  • 입력 2006년 1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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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싫어도 해야 하고,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할 말이 있다. 북한의 통일전선전략 얘기가 그렇다. 북의 핵실험에도 좀처럼 꺾일 줄 모르는 친북 좌파의 준동을 독해(讀解)하려면 이에 관한 기초지식이라도 있어야 한다. 부디 낡은 냉전 노트를 꺼낸다고 힐난하지 말기 바란다.

북한의 정치용어사전에 따르면 통일전선은 ‘혁명적 승리에 이해(利害)관계를 같이하는 여러 정당 사회단체 및 개별적 인사를, 공동의 원쑤(원수)에 반대하기 위하여 (하나로) 묶은 정치적 연합’이다. 한마디로 공산당만으로는 힘드니 동조세력(전선)을 규합해서 투쟁한다는 전략이다. 상대는 물론 적화(赤化)에 장애가 되는 주적(主敵) 즉 ‘미제(美帝)’다.

1921년 6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3차 세계대회에서 채택된 레닌의 ‘전술에 관한 테제’가 그 모태다. 레닌의 말이다. “너에게 3개의 적(敵)이 있거든 그중 둘과 동맹하여 하나를 타도하고, 나머지 둘 중 하나와 다시 동맹하여 다른 하나를 타도하고, 마지막 남은 하나는 1 대 1로 대결하여 타도하라.”

박물관에 가 있어야 할 이 전략이 대한민국 곳곳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올봄 평택을 흔들었던 미군기지 확장 저지 시위도 그중 하나다. 현지 주민들은 오히려 뒷전이고 통일연대 한총련 민주노총 등 이념집단들이 ‘범국민대책위(범대위)’라는 이름 아래 ‘전선’을 형성해 투쟁을 이끌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시위도 같다. 농민이 중심이라고 하나 일부 노동자 종교인 지식인 학생들이 견고한 핵심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북의 통일戰線과 남의 反美전선

목표는 물론 미군 철수, 미국 배제다. 반미(反美)를 위해 소소한 이해관계는 일단 접어 두고 하나로 뭉친 것이다. 한미 FTA만 해도 농민과 도시근로자 간에 득실계산이 다를 테지만 지금 단계, 북측 표현으로 ‘혁명의 일정한 단계’에선 문제가 안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단체를 만들고 투쟁할 수 있지만 우리처럼 ‘반미’라는 줄 하나로 이들을 꿸 수 있는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분단의 상처가 아무리 깊다고 해도 어떻게 선생님들의 연가투쟁과 지하철 노조원들의 파업 현장에 반미투쟁을 다짐하고 부추기는 포스터와 피켓이 난무한단 말인가.

대다수 구성원은 그런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집단의 이름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는 그들의 활동은 북의 통일전선전략과 정확히 궤를 같이하고 있다. ‘민족끼리’라는 구호를 한번 보자. 듣기 좋고 감성적인 이 네 글자에 북의 통일전선전략의 정수(精髓)가 녹아 있다.

북은 1993년 2월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자 남한을 향한 구호를 ‘반(反)파쇼 민주화투쟁’에서 ‘민족 대단결’로 바꾼다. 군사독재 시대가 막을 내리고 문민정부가 들어섰으므로 ‘반파쇼 투쟁’을 부추기는 것은 명분도 효과도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 대신 “외세를 배격하고 민족끼리 단결해 통일을 향해 나아가자”고 외친다. 그해 4월 7일 김일성이 ‘조국통일을 위한 전(全)민족 대단결 10대 강령’을 제시한 것은 그래서다. 1998년 김대중 정권(국민의 정부)이 출범했을 때 김정일이 내놓은 ‘민족 대단결의 5대 방침’도 똑같은 취지였다.

‘민족 대단결’은 2005년 1월 민족자주공조, 반전평화공조, 통일애국공조의 ‘3대 공조’로 바뀐다. ‘단결’이 ‘공조’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남한의 보수세력이 ‘한미공조’로 북핵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하니까 이에 대한 대구(對句)로 ‘민족공조’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온 것이다.

反파쇼에서 민족단합까지

‘3대 공조’는 올해 1월 다시 자주통일, 반전평화, 민족 대단합의 ‘3대 애국운동’으로 바뀌었다. ‘민족공조’가 ‘민족 대단합’으로 바뀐 배경도 재미있다. 북에 온정적인 노무현 정권의 침몰을 막기 위해 ‘반(反)보수 대연합’을 촉구하려다 보니 ‘단합’이란 표현이 더 편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친북 좌파가 경배해 마지않는 ‘민족끼리’의 역사다.

나는 스스로를 ‘중도우파’쯤으로 생각한다. 좌파도 가능한 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먼저 북을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다. 반미도, 통일도 좋지만 우선 북의 의도와 투쟁방식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사실(fact)은 너무도 신성해서 이념의 벽쯤은 쉽게 뛰어넘는다. 그런데도 근래엔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일수록 천착하려 들지 않는 듯하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 @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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