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바르샤바에 울린 정주영 ‘진혼곡’

  • 입력 2008년 3월 20일 03시 02분


1960년대의 마지막 해에 태어난 유재준은 60년대의 첫해에 태어난 진은숙을 “누나”라 부른다. 세계에 현대 한국을 대표하는 작곡가가 둘 다 전 지구적인 문화대혁명의 시대인 60년대 태생이다. 한국의 386세대 중엔 이런 알짜도 있었구나 하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된다. 누나라 부르긴 하지만 유재준은 진은숙과 차별화되기를 때로 강조한다. “누나는 좌파고 나는 우파!”라고….

물론 386세대가 정치적으로 살벌하게 떠벌렸던, 시대착오적인 좌우의 대립구도도 있다. 그러나 음악적 차원에서 유재준이 말하는 “좌”와 “우”의 대결은 살벌하지도 않고 재미가 없지도 않다.

서울의 강석희와 함부르크의 죄르지 리게티를 사사한 진은숙은 현대음악의 최전선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음향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전위주의자란 의미에서 좌파라 한다면 역시 서울의 강석희와 크라쿠프의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를 사사한 유재준은 조성(調性)을 되찾은 보편적인 음악언어로 창작하는 ‘전통주의자’란 의미에서 우파로 자처하는 모양이다.

진은숙은 지난해 여름 뮌헨 오페라 축제의 개막작으로 초(超)한국적 범(汎)세계적 동화(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작품화해 상연했다. 올봄 유재준은 바르샤바의 베토벤 축제 전야제에서 고(故) 정주영과 그 세대를 추모하는 ‘교향악적 진혼곡’이라는 한국현대사에서 제제한 작품을 발표했다.

민족사 긍정한 유재준의 작품

진은숙이 어디까지나 내면적 개인적인 세계에 귀 기울이고 안으로 파고든다면 유재준은 외부적 역사적 세계에 눈을 돌려 바깥세상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것인가. 만일 개인적 지향이 우파적이고 사회적 지향이 좌파적이라 한다면 여기쯤부터 진은숙과 유재준 음악을 대비시킨 좌우의 위상은 뒤바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재준이 “나는 우파”라 말하는 것은 그의 사회적 관심이 386세대의 과격파와는 달리 민족공동체나 민족사의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과감하게 긍정하고 있기 때문인 것도 같다.

그렇다. 유재준의 ‘진혼곡’은 어떤 면에선 그의 ‘에로이카 교향곡’이라 할 수도 있다. 베토벤의 ‘에로이카’는 자유의 영웅이 이내 황제로 군림해 자유의 억압자가 되자 그의 헌정사를 지워버렸지만 유재준의 ‘진혼곡’이 노래한 ‘에로이카’는 그럴 필요가 없다. 주인공이 타계했기 때문에 거기엔 ‘고(故) 정주영과 그 세대를 추모하며’라는 헌정사를 그대로 적어 두고 있다.

19세기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이 맨해튼과 미국 자본주의의 성장을, 링컨 대통령과 미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노래한 것처럼 유재준은 6·25전쟁의 폐허에서 ‘번영과 발전을’ 누리는 오늘의 한국을 건설한 ‘위인들의 높은 뜻과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진혼곡을 썼다.

그러나 왜 가톨릭 미사를 위한 진혼곡인가. 유재준은 스승의 발자취를 따라가려는 것일까. 펜데레츠키의 ‘폴란드 진혼곡’을?

그러고 보면 ‘폴란드 진혼곡’도 보편적인 종교음악이기보단 특정 지역에 관련되는 역사적 작품이라 볼 수 있다. 1970년 폴란드의 노동자 폭동을 기념해 작곡한 ‘눈물의 골짜기’, 1981년 국가 권력에 대한 폴란드 교회의 저항의 상징이었던 위친스키 추기경의 장례를 위한 ‘하느님의 어린 양’, 또는 히틀러 점령치하의 바르샤바 폭동을 기념해 쓴 ‘신의 노여움’, 그리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젊은이를 대신해 자진 처형당한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를 추념하는 ‘기억하라’ 등 펜데레츠키의 ‘진혼곡’은 바로 20세기 폴란드 현대사의 비극적인 ‘에로이카 조곡’처럼 내겐 다가온다.

폴란드 스승이 내린 각별한 사랑

거기에는 내 개인적 추억도 얽혀 있다. 1985년 우연히 밀라노의 스칼라에서 작곡자가 지휘한 ‘폴란드 진혼곡’을 들은 날 밤 내가 펜데레츠키와 사귄 것이 기연이 돼 우리는 그의 ‘교향곡 5번 한국’을 얻게 됐고, 또 그를 한국의 친구로 얻게 됐다.

펜데레츠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과 유재준의 ‘교향악적 진혼곡’으로 꾸민 이번 음악회를 ‘거장과 도제의 콘서트’라 이름붙인 것은 사제 간의 각별한 사랑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현대 학교 교육에선 볼 수 없는 도제교육, 전인적 몰입적 도제교육을 폴란드의 스승이 한국의 제자에게 베풀어 왔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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