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칼럼]모스크바 한 겨울밤의 꿈

  • 입력 2003년 12월 24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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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 복을 타고난 것일까. 불과 사흘간의 모스크바 여행인데도 볼쇼이 발레의 뉴 프로덕션(신작)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프레미에’(첫 공연)를 구경했다. 나는 뜻밖에도 그 안무의 ‘혁명적’이라 할 만큼 참신한 전위성에 놀랐다. 볼쇼이 발레라면 과거 소비에트 체제하에선 세계 최고의 기량과 역시 세계 최고의 보수성으로 정평이 난 명문이었다. 그 볼쇼이가 이제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발레가 무엇인가. 20세기 발레가, 20세기 음악이, 아니 도대체 20세기 유럽의 문화혁명이 러시아 발레로 해서 막을 올렸다고 하면 망발이 될까?

▼거장 포킨 1936년 춘향전 按舞 ▼

여성 중심의 19세기 발레와 달리 니진스키, 누레예프, 바리슈니코프 등 남성 무용의 20세기 스타를 등장시킨 것도, 스트라빈스키, 프로코피예프 등의 새로운 음악을 세계에 선물한 것도, 그리고 무용극 ‘봄의 제전’으로 20세기 초의 문화혁명을 일으킨 파리의 샹젤리제극장 스캔들의 주인공도 모두 러시아 발레단이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동화처럼 아름다운 모스크바의 야경을 보는 내 마음은 흥분해 버린다. 그래, 바로 그 러시아 발레단이 고국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망명지 몬테카를로에서 제2의 중흥기를 구가할 때 한국의 ‘춘향전’을 대본으로 한 발레를 무대에 올린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프레미에’는 1936년 4월 4일, 안무(按舞)는 미하일 포킨, 미술은 앙드레 드랭, 음악은 W A 모차르트. 그야말로 꿈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스태프 구성이다. 포킨이라고 하면 ‘빈사(瀕死)의 백조’를 비롯해 러시아 발레에 세계적 명성을 안겨 준 ‘불새’ ‘페트루슈카’ ‘쇼피니아나’ 등을 안무한 20세기 고전발레의 최고 거장. 그리고 무대장치와 의상을 맡은 드랭은 마티스, 블라맹크와 함께 프랑스 야수파를 대표하는 3대 화가다. 전 5경(景)으로 구성된 이 발레는 장면마다 모차르트의 작품들을 반주 및 배경 음악으로 쓰고 있다.

러시아 발레단이 춘향전을 대본으로 한 무용극을 공연했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것은 30여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 그 후 누군가가 포킨의 무보(舞譜)를 찾아 우리의 ‘춘향전’을 세계 발레의 레퍼토리로 부활시켜 주었으면 하는 소망에서 잡지에 글을 쓰고 책에도 소개했다. 그러나 ‘한국 문화의 세계화’다, ‘문화상품 개발’이다 하는 구호들은 요란한데도 포킨 안무의 춘향전 대본 발레에 대해선 문의해 온 사람도, 관심 갖는 사람도 아직 없다. 하도 답답해서 올봄엔 어느 무용잡지 발행인에게 이 무보를 발굴해 보라고 건의하기도 했으나 영세한 잡지사로선 벅찬 일이라는 대답이었다.

그래도 공연 예술을 아는 척하는 저명인이나 외교관들을 만나면 으레 듣는 얘기가 왜 푸치니는 중국을 무대로 ‘투란도트’를, 일본을 무대로 ‘나비부인’을 작곡하면서도 한국을 위해선 아무것도 작곡하지 않았느냐는 헤식은 소리다. 그러나 아무리 세계적인 대가가 한국을 테마로 작품을 써놓는다 해도 우리가 그를 무시하고 잊어 버리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토스카니니처럼 유럽과 미국, 신구 대륙의 ‘두에 몬디’(두 세계)에 걸쳐 활약하고 있는 이탈리아의 거장 잔 카를로 메노티가 서울올림픽을 위해 ‘시집가는 날’을 대본으로 오페라를 작곡했어도 그를 국내에서는 완전무결하게 무시하고 망각해 버렸다. 그러면서도 남의 집 장맛만 달다고 입맛을 다신단 말인가.

▼사라진 舞譜 하루빨리 찾아내길 ▼

지난해 4월 나는 처음으로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금도 옛 이름의 레닌그라드 필하모니가 5월 정기공연에 베토벤과 펜데레츠키의 교향곡 각 5번을 연주한다는 광고를 보고 무척 기뻤다. 베토벤의 5번은 물론 ‘운명’이요, 펜데레츠키의 5번은 ‘코리아(한국)’다.

나이 70이 넘으니 마음이 조급할 때도 있다. 어느 기관에서든(그리 큰돈이 들 것 같지도 않으니) 내 생전에 포킨 안무의 ‘춘향전’ 무보를 발굴해 세계무대에 올려놓는 것을 보았으면 싶다. 얼마 전 구순(九旬)의 박용구옹을 뵈었더니 요즈음 우리나라 발레 무용수의 수준이 크게 향상됐다고 대견해 했다. 포킨 안무에 한국 무용수가 주역을 춤추는 ‘춘향전’을 세계무대에…. 모스크바의 한겨울 밤의 꿈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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