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칼럼]탈냉전 시대로 무임승차?

  • 입력 2003년 9월 3일 18시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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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수구’ 세력이란 말을 요즘 흔히 듣는다. 물론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냉전이 종식된 세계에 아직도 ‘냉전 수구’ 세력이 있는 모양이다. 그 사실은 나도 알 것 같고 인정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냉전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독일의 분단과 더불어 시작됐고 1990년 독일의 통일과 함께 ‘철의 장막’이 걷히면서 끝난 것으로 상징되고 있다. 1945년 소련은 대독(對獨)전의 승리로 유럽 최강대국으로 부상했다. 1990년 소련은 동유럽 바르샤바조약기구의 붕괴와 함께 스스로 해체의 운명을 맞았다.

1945년 나치 ‘제3제국’의 몰락에서부터 1990년 소비에트제국의 몰락까지 45년간 지속된 냉전시대는 독일의 브란덴부르크 성문에서 한반도의 38도선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문명세계가 동서 두 진영으로 양분돼 정치 경제 이념의 다중적인 차원에서 대립 대치 대결하던 시기였다. 거의 반세기나 끌어 온 냉전은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의식구조나 사회체제에 매우 부정적인 경직화 현상을 가져오기도 했다.

▼ 문 꼭 닫은 北은 아직 냉전체제 ▼

그렇기에 유럽에서 냉전이 종식된 뒤 아직도 국제관계나 사회관계를 예전처럼 이분법적 대립 구도에서 보려고 한다면 그건 냉전 수구파로 몰리게 될 것이나 유럽에 그러한 세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우리의 경우는 다르다. 우선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한반도 밖에서의 냉전 종식이 ‘자동적으로’ 한반도에도 냉전 종식을 가져온 것일까. 이 문제를 따져보기 위해선 먼저 유럽에서 냉전이 어떻게 끝났으며 도대체 냉전 종식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냉전은 첫째, 군사적인 차원에선 핵군비 무한 경쟁의 무모함과 불길함을 미-소 초강대국의 한쪽 또는 양쪽이 인식하고 그를 끝내려 한다는 상대방의 진의를 인정했을 때 끝이 났다. 그러한 냉전 종식의 이니셔티브를 취한 것이 옛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였다.

둘째,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유럽의 대표적인 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도 지적한 것처럼 1960년 이후 낙후성이 드러난 사회주의가 특히 1970년대의 탈(脫)산업혁명으로 쇄신한 자본주의에 대해 경쟁력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의 초강대국 사이의 대결 판국에서 경쟁에 처진다는 것은 곧 파멸을 뜻한다”고 그는 적고 있다.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표방하면서 스스로 해체됐고, 그에 앞서 폴란드에서는 ‘자유노조’ 투쟁이, 헝가리에서는 공산당 내부의 개혁 세력이, 그리고 체코와 동독에서는 반체제 시민운동이 저마다 소비에트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면서 냉전시대의 종언을 재촉했다. 이른바 ‘탈냉전’ 시대가 열리기까지엔 이미 1980년부터 군부의 계엄통치 하에서 자유노조 운동을 전개했던 폴란드의 솔리대리티를 비롯해 동유럽 제국의 수많은 자유와 인권을 위한 투쟁이 선행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계는 탈냉전의 21세기를 살고 있는데 한반도에서만은 아직도 ‘냉전 수구’ 세력이 발호한다면 그건 심상치 않은 일이요, 불행한 일이다.

밖의 세계에서는 핵군비 경쟁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군사적 차원에서 먼저 냉전을 종식시킨 지 오래인데 아직도 핵무기에 집착하는 한반도의 ‘냉전 수구’ 세력은 누구일까. 옛 소련 및 동유럽 제국은 물론이요,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 베트남까지 경제를 ‘개혁’하고 문호를 ‘개방’하는 탈냉전시대에 아직도 개혁과 개방을 못하고 있는 ‘냉전 수구’ 세력은 한반도의 어느 쪽일까. 그런 세력이 있다는 말에 나는 동의하고 그게 어느 쪽인지도 알 것 같다.

▼북한과 ‘민족 공조’ 주장 안될말 ▼

알 수 없는 것은 냉전이 끝났음을 별나게 강조하면서 이른바 ‘민족 공조’를 주장하는 ‘탈냉전주의자’들이 그렇다면 냉전이 어떻게 끝났는지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유럽에서의 냉전 종식은 서방 동맹 체제의 포기가 아니라 그의 굳건한 견지로 이뤄졌다. 냉전은 동서의 ‘공조’나 화해로 종식된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 체제의 파멸로 종식된 것이다. 한반도의 ‘민족 공조론’자들은 받아들이기 싫을지 몰라도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개혁, 개방도 안 하고 세습 독재 체제를 ‘수구’하면서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는 북한과 21세기의 ‘동족 공존’을 얘기한다? 탈냉전 시대에 무임승차하겠다는 것인가?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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