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박영서]슈퍼컴이 노벨상 만드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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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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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12월 10일이 되면 전 세계의 눈과 귀가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쏠린다. ‘세계 최고의 지성’으로 손꼽힌 노벨상 수상자를 보기 위해서다. 수상자의 기쁨에 찬 얼굴을 볼 때마다 부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단 한 번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현실 때문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가졌으며 과학경쟁력은 세계 3위, 기술경쟁력은 14위(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 발표)인 데다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 강국 입장에서 노벨상의 부재는 사실 면이 안 서는 일이다.

노벨상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방법론을 찾아볼 셈으로 노벨상 과학기술 부문 수상업적을 죽 훑어보니 하나의 공통점이 눈에 띄었다. 2009년 수상 이유인 ‘세포 노화과정 규명’ ‘리보솜의 정밀구조 규명’ ‘광섬유통신 기술’과 ‘전자결합소자 개발’은 물론이고 그 이전의 ‘거대자기저항(GMR)’이나 ‘우주의 비대칭 기원 규명’ 등 대부분의 업적이 과학기술 첨단화·거대화의 산물이라는 점이었다. 이런 연구개발(R&D)은 필수적으로 고성능 컴퓨팅(HPC)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염색체 끝의 텔로미어를 통해 노화 과정의 비밀을 풀거나 단백질 공장으로 불리는 리보솜의 구조를 규명하는 연구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인간 세포의 구성 기능 역할을 분석하는 작업이 동반된다. 이를 대용량 계산자원 없이 일일이 연구자가 수행하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또 우주와 지구를 다루는 초대규모 R&D와 원자·분자 단위를 연구하는 극소규모 R&D 역시 고성능 컴퓨팅이 없다면 수년 혹은 수십 년이 소요된다. 당연히 최근 노벨상 수상자의 연구 대부분에 고성능 컴퓨팅을 적용한다. 누가 더 뛰어난 역량의 고성능 컴퓨팅을 활용할 수 있는가에 따라 연구 성과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고성능 컴퓨팅 수준이 연구 성과로 직결되고 이것이 곧 노벨상과 같은 국제적 위업으로 이어지는 사이클이 형성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많은 국가가 고성능 컴퓨팅을 집중 지원한다. 미국만 보더라도 고성능 컴퓨팅에 대한 최우선적인 지원을 법규로 정해놓았다. 미국이 컴퓨팅 기술을 선도함으로써 지금껏 글로벌 리더국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음을 입증한다.

한국 역시 20년 넘게 슈퍼 컴퓨팅 구축사업을 추진했다. 1988년 슈퍼컴퓨터 1호기 도입을 시작으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은 세계 10위권(SC 2009 발표)의 슈퍼컴퓨터 4호기 도입을 마무리했다. 이런 역량을 기반으로 KISTI는 수년 전부터 정부가 선정한 국가석학(스타과학자)과 세계적 수준의 국내 계산과학자, 다시 말해 미래의 노벨상 후보자에게 슈퍼 컴퓨팅 자원을 우선적으로 무상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집중 추진해왔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컴퓨팅은 오늘의 1위가 내일의 10위가 될 정도로 급변하므로 높은 수준을 항상 유지하려면 슈퍼 컴퓨팅에 대한 강력한 지원을 법제화해야 한다.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반영해 ‘국가슈퍼컴퓨팅육성법’이 국회에 발의된 상태다.

천재적인 연구자 한두 명의 노력만으로 노벨상이 도출되는 시대는 지났다. 최고를 낳는 최고의 슈퍼컴퓨팅이 필요하다. 국가차원의 드라이브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노력이 차곡차곡 쌓여 가까운 미래의 어느 12월, 스웨덴 스톡홀름 노벨상 시상식에서 한국 과학자의 이름이 당당히 호명되는 감동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박영서 한국과학기술 정보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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