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 열린마음 열린세상]˝주5일 근무제 자신 있습니까˝

  • 입력 2002년 5월 29일 18시 13분


이제 주 5일 근무제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인 것 같다. 노사정간 원칙적인 합의도 이뤄진 것 같고 세부 사항에서 진통이 있는 모양이다.

은행 같은 큰 조직에서 실시하겠다고 나섰으니 주 5일 근무제의 확산은 급물살을 탈 것 같다. 지난 주 은행장과 노조위원장이 합의 후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악수하는 모습이 참 보기에 좋았다.

한데 왜 하필이면 은행에서 선수를 치고 나올까. 열악한 작업 환경의 힘든 육체 근로자부터 시행되어야 순서일 것 같은데. 그리고 지난 경제 위기의 진원지가 은행이 아니었던가. 피 땀 흘려 맡겨둔 예금을 찾느니 못 찾느니 무척이나 애를 태우게 하더니, 구조조정으로 수많은 동료들을 쫓아내더니, 그리곤 위기의 한국 경제를 볼모로 가히 천문학적인 공적 자금이 들어가지 않았던가.

▼잡담…전화…느슨한 일터▼

그 빚을 다 갚고 그러는지, 국민으로선 궁금하다. 주 5일 근무제의 당위성을 인정하면서도 “우리 형편에?”하는 국민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오래 전부터 이 제도가 정착되어 왔다. 부지런함만이 먹고 살 길이란 생각에 젖어 있던 한국 유학생 입장에선 이렇게 많이 놀아도 되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한데 그네들의 직장 분위기를 보면 그래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살벌하다.

공사가 분명해 근무 시간 중엔 일체의 잡담이나 개인 용건은 용납되지 않는다. 오전과 오후의 휴식 시간 20분 이외에 일하는 동안은 완전히 집중한다.

그러나 여기도 느슨한 구석이 있었다. 문제는 금요일 오후다. 점심 시간부터 이미 파장 분위기다. 중요한 회의도 금요일 오후는 피한다.

서로 알아서 배려를 한다. 병원에선 큰 수술도 없다. 눈치껏 퇴근한 차들로 고속도로는 일찍부터 몸살을 앓기 시작한다. 이렇게 따진다면 5일이 아니라 4.5일 근무다.

그럼 우리의 일터 분위기는 어떠한가. 혹평을 하자면 보리밭 매는 풍경이다. 일 하는 건지 노는 건지. 커피, 잡담, 개인용 전화, 면회…. 거기다 느긋한 점심 시간, 한 잔에, 사우나까지, 그러고는 잔업으로 밤늦게까지 일한다.

어쨌거나 그 덕에 외국 바이어들로부터 상당한 신용을 얻을 수 있었다. 오죽하면 부지런한 일본 사람을 게으르게 보이도록 만들었을까. 실은 이게 우리의 장사 밑천이었다. 생산성은 뒷전으로 하고. 대단한 기술도, 경험도 없는 우리에게 외국인이 일감을 준 건 우리의 근면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노파심에서 묻고 싶은 건 이 점이다. 이제 근면에 주던 점수를 보충할 만큼 우리 기술이, 노하우가 발달되어 있는지. 합리적이고 열린 경영, 공사 구별, 정직과 신용, 노사의 유연성, 정치인들의 청렴…. 이런 항목에서 우리는 몇 점을 딸 수 있을까. ‘근면성’을 빼고 말이다.

중국이 우리 시장을 잠식하는 걸 두려워하고 있는 형편이 아닌가.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우리 시장을 다 내주어도 좋다. 그리하여 중국의 구매력이 커지면 우리의 하이테크(Hi Tech), 하이터치(Hi Touch) 상품으로 승부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궁금한 건 이 점이다. 노사정 모두에 묻고 싶다. 정말 자신 있습니까. 은행이 선수를 치고 나선 게 축하보다 걱정이 앞서는 건 그래서다.

공적 자금을 그렇게 썼으면 이 문제에 관한 한 국민과의 정서적 공감대 형성이 있어야 한다.

어떤 기업이든 잘 나간다고 임금과 복지를 노사간 합의만 하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도 선뜻 동의할 수 없다.

자유 경쟁 체제에서 무슨 소리냐고 몰아붙일 수도 있겠지만 비슷한 업종의 영세, 중소 기업들의 입장도 생각해 보자는 거다. 여기가 부실하면 잘 나가는 큰 기업도 끝장이다. 이건 상식이다.

▼영세기업 입장도 생각하자▼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러다 망하면 그 부실 덩어리를 온통 국민이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3월 세계 제일의 부국 스위스의 국민 투표 이야기는 우리에게 좋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

현행 주당 45시간을 그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줄일 것인가를 물은 것이다. 결과는 현행대로였다. 부자가 공짜로 되는 게 아니다.

대세를 돌이키자는 건 아니다. 그러나 여기엔 경제적 측면은 물론이고 국민 의식, 생활 철학, 가치관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일터의 특성에 따라 치밀한 정지 작업 및 보완책을 강구해야 한다.

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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