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위헌정국’의 숨은 그림

  • 입력 2004년 10월 27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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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노무현 정권에 대한 타격으로 보는 견해가 많지만 한 정권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다. 국가와 국민간의 신뢰관계를 심각하게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위신, 국가에 대한 신임, 국정의 공신력은 이번 사건으로 크게 흔들렸고 심상치 않은 여진을 남겼다. 집권 여당은 그 이유를 ‘헌법을 스스로 훼손한 헌재’에 있다고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라. 그렇지 않다. 헌재 결정의 핵심은 국가중대사를 결정하면서 민의 수렴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헌재는 국민의사를 강조한 것이고 이를 소홀히 한 것은 정권이다. 한번 새겨진 국민적 불신은 해소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두고두고 다음 정권에 부담을 남겼다. ‘위헌정국’이 드리운 짙은 그림자다.

▼수치심 잃은 정권의 언동▼

지금 국가위신, 정권신임, 국정공신력의 실상은 어떤지 둘러보라. 희화화된 국가지도자의 이미지는 고약해졌고 최근엔 차마 그대로 옮기기가 거북할 정도다. 정권은 물론 집권 여당에 대한 지지도가 계속 하강곡선을 그린 지도 오래됐다. 서민들은 하루 살기가 어렵다고 아우성이고, ‘청년 백수’는 아직도 심각한 상황이다. 이것이 정권을 보는 국민의 눈이고 심판이다. 나라 사정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시도 때도 없이 둘러대는 ‘개혁’이란 말에 민심이 따라 주리라고 생각했다면 참으로 큰 착각이다. 민심의 외면으로 부실한 기초공사 속에 추진하는 일들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를 일깨워 준 것이 헌재 결정 아니겠는가. 그런데 헌재 결정 후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어떤가. 엄청난 충격을 준 국정 차질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성하는 자세로 국민에게 사죄라도 했어야 한다. 그럼에도 정작 집권 세력 안팎에서는 ‘헌재를 탄핵하자’는 극언과 규탄대회를 앞세운 ‘헌재 때리기’가 한창이다. 수치심을 잃은 정권일수록 ‘남의 탓’을 찾는 법이다. 여론의 66%가 헌재 결정을 지지한다는 말이 들리지도 않는가.

집권 세력의 해괴한 언동을 보면 앞서 국민의사, 자성, 수치심 이야기를 꺼낸 것 자체가 공허하고 쑥스럽다. 지금 형세로는 친노(親盧) 세력을 재정비하여 투쟁을 더 멀리, 깊이 펼치겠다는 ‘결의’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대선 후 집권 세력이 제일 먼저 외친 것이 ‘사회 주류를 바꿔 버리겠다’는 구호다. 세상을 뒤집겠다는 이 ‘숨은 그림’이 바로 집권 세력이 추구하는 본령이다. ‘친북 좌경’도 숨은 그림 중 하나다. 곳곳에 ‘친북 좌파’ 기류가 넘실대는 데도 ‘내가 좌파요’ 하고 나서는 이는 하나 없으니 기괴한 일이다.

숨은 그림은 교묘하게 위장돼 있어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개혁이란 모자를 씌워 국회에 제출한 과거사법, 언론법, 사학법, 국보법안은 사회주류 교체의 분야별 전술이다. 이들 앞에 헌재인들 문제이겠는가. 노 대통령의 ‘입법권 무력화 반복되면 헌정질서 혼란 우려’란 헌재 압박 강수(强手)는 그런 심사가 표출된 것이고 이해찬 총리의 ‘동아-조선 까불지 말라’는 노골적인 폭언이다. ‘역사 반역자’ ‘정권 농락’은 쉽게 나올 말이 아니다. 비판 언론 때문에 마음대로 안 된다는 집권 세력의 독선적 적개심의 발로 아닌가. 작심하고 한 이 말도 숨은 그림 중 하나다. 여기에 집권 여당 당의장, 문화관광부 장관, 행정자치부 장관까지 가세했다. ‘줄서기 경쟁’이라도 하는가. 이쯤 되면 공세의 강도를 알 만하다. 여기서 하나만 묻자. 동아-조선이 반역자라면 많은 독자는 ‘반역의 동참자’란 말인가. 큰 실수다.

▼‘세상 뒤엎기’ 위장전술▼

한마디 더 하자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총리 발언은 권력의 미묘한 역학관계를 건드렸다. ‘대통령과 나는 끝까지 싸울 것’ ‘나와 대통령을 흔들려 한다’는 대통령과 자신을 ‘하나’로 묶고 있다는 점에서 권력 내부의 민감한 반응을 불러올 수 있다. 대권 경쟁의 물밑작업이 이미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잠재적 경쟁자를 단숨에 뛰어넘겠다는 의사표출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서 또 다른 숨은 그림이다. 숨은 그림이 많으면 조직도, 사회도 불안해진다. ‘위헌 정국’에서 너무 많이 드러나 버렸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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