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일본제철의 화해 결정 지금도 못 할 이유가 없다[광화문에서/박형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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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7월 14일 일본 이와테현 가마이시 제철소에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미국과 영국 함대에서 발사한 포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타자수로 일하던 21세 여성 지다 하루(千田ハル) 씨는 곧바로 방공호로 뛰었다. 경보 해제 후 밖으로 나오니 제철소 굴뚝은 모두 꺾였거나 구멍이 나 있었다. 마을도 검은 연기로 자욱했다. 지다 씨는 너무 무서워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2014년 8월 14일자 이와테일보 참조).

연합군은 같은 해 8월 9일에도 가마이시에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 두 번의 공격으로 가마이시에서만 756명이 숨졌다. 사망자 중에는 강제로 가마이시 제철소로 끌려간 한국인 노동자도 포함됐다.

꼭 50년이 흐른 1995년 9월. 사망한 한국인 노동자의 유족 11명이 유골 반환과 미지급 임금 지불 등을 요구하며 신일본제철(현 일본제철)에 소송을 제기했다. 가마이시 제철소는 전쟁 후 수차례 인수합병을 거쳐 신일본제철로 이름을 바꾼 상태였다. 지다 씨는 당시 법정에 서서 함포사격 당시의 비참한 상황을 증언했다. 2년간의 법적 공방 끝에 1997년 9월 신일본제철은 ‘화해’를 선택했다. 사망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내고, 관련 행사에 참여하는 경비 등 명목으로 원고 1인당 200만 엔(약 2160만 원)을 지급했다. 원고는 이를 받아들였고 소송을 취하했다.

‘화해’ 단어가 최근 다시 등장했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지난달 5일 일본 와세다대에서 “강제징용 판결에서 승소한 피해자들에게 ‘위자료’가 지급되면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이 ‘대위변제’된다”며 “‘재판상 화해’가 성립된 것으로 간주하자”고 제안했다. 쉽게 풀어 쓰면 승소한 피해자들은 위자료를 일본 기업에서 직접 받는 게 아니라 한일 기업 등이 조성한 기금에서 받는 것이다. 이때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이 끝난 것으로 하자는 취지다.

일본 반응은 나쁘지 않다. 한국에선 조심스럽게 접근하지만 비판의 목소리도 여전히 강하다. 징용 피해자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인정과 진심 어린 사죄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문 의장의 안이 일본 기업에 면죄부를 준다는 비판도 나온다.

1997년 소송 때 도출된 화해 해법을 현 소송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겠지만 본질은 비슷할 수 있다. 22년 전 화해 당시 원고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신일본제철은 유골 조사를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우리와 함께 한국에서도 조사했다. 이러한 대응을 높게 평가하고 감사한다”고 밝혔다. 원고들의 분노가 적어도 어느 정도는 누그러졌음을 시사한다.

당시 신일본제철 국내법규 담당자 자격으로 강제징용 문제 소송을 담당했던 가라쓰 게이이치(唐津惠一) 도쿄대 교수는 10월 말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법적 책임을 인정하진 않았지만 유골이 반환되지 않았던 점에는 인도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화해’란 선택지를 택했다”고 했다. 기업이 적극적으로 움직여 해결책을 모색했다는 얘기다.

강제징용 문제를 둘러싼 해법을 두고 다양한 선택지도 있겠지만 소송 원고와 피고 기업이 1차적으로 문제를 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1997년 해법이 참고할 모범답안 가운데 하나일 것 같다.

박현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화해#한일관계#배상#강제징용#신일본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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