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은 버리고 가자]김영민/얄팍한 실용주의

  • 입력 1999년 12월 20일 19시 58분


조악한 일차원적 실용주의가 시대의 부호처럼 흘러다니고 있다. 그 배경에는 우리 근대화의 명암이 자리한다. 이를테면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급속히 마감하고 섣부르게 세계화의 흐름에 편승하면서 기생한 졸부의식과 정보사회적 선정주의가 서식한다. 투박한 산업화에 이어 들뜬 세계화로 북적대는 사이에 ‘사람의 세상’을 위한 정신문화적 구상이 왕창 빠져 있는 것이다.

간단히 그것은 배(산업화)와 가슴(민주화)을 통합시키는 머리(심층근대화)를 빠뜨린, 그야말로 ‘정신없는 근대화’의 부작용과 다름없다. 이른바 ‘신지식’이란 머리 없는 몸통만의 근대화를 딛고 피어오른 세계화의 조화(造花)인 셈이다.

실용주의를 한가지로 타박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미국사회의 미덕을 따지면서 프런티어 정신에 기반한 실용주의에 높은 점수를 주듯이, 적실성이 있고 장기적으로 삶을 윤택하게 하는 실용성이란 추구해서 마땅하다. 기실 우리 사회는 실용주의의 철학을 깊이 검토해 본 적도 없다.

다만 문제는 심층의 실용성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질적 표층적 근대화와 다르게 심층근대화의 기획에 맞물리는 개념이다.

▼도구로 전락한 지식▼

요컨대 표층의 실용성이란 조급한 결과주의이고, 수치와 통계에 기반한 물량주의와 공간주의이며, 심층의 숙성을 견디지 못하는 속도주의이다. 이것은 사람살이를 경제적 잣대 속에 재배치시키는 일종의 환원주의이며, 신화와 영성에까지 닿아 있는 인간실존의 내적 지평과 의미에 암둔한 관료주의와 다름없다.

‘신지식’이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배경으로 성장의 신화에 따라 움직이는 가장 세련된 형태의 표층적이며 일차적인 실용주의다. 그것은 지식을 정보나 도구적인 장치의 일종으로 환원시키고, 그 정보의 부가가치성에 착안해서 이른바 정보사회, 혹은 ‘지식기반사회’에 후기자본주의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인간상을 발굴하고 독려하려는 발상이다. 만약 이 신지식의 한계와 그 시의성을 분명히 해준다면, 가령 고루하고 타성적인 관료를 경계한다거나, 즉물적 노동의 틀에 갇혀있는 산업전사들의 시야를 넓힌다거나, 생산성없는 사변과 현학에 취해 있는 문사(文士)들을 일깨우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지식’이 대변하는 실용주의의 효율성 논리는 인문주의의 원천인 고독한 내면의 공간에 미치지 못한다. 무릇 지식인이란 자기성찰을 매개로 이념과 체제에 근원적 비판의 거리를 두는 법인데, 이 신지식의 실용주의는 주로 체제순응적 관리지식의 범위 내에 머문다. 또한 이 지식에서는 구조와 제도적 차원의 인식에 기초해서 변혁을 추구하는 사회과학적 감각을 엿볼 수도 없어 마치 재치있는 아이디어같은 느낌을 준다.

▼값싼 효율·정보 추구▼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지식인의 기대치를 정보사회적 실용성만으로 채울 수는 없다. 최소한 그것은 내면의 성숙과 기량을 바탕으로 제도와 구조의 틈을 노리고 드는 맛쯤은 있어야 한다.

인문적 지혜가 살아있는 사회라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공글러온 기본과 원칙이 숨쉬는 사회라면, 그래서 공동체 전체의 속깊은 건강과 유기적 조화에 관심을 가진다면, 하루 아침에 상명하달식으로 지식혁명의 칙서(勅書)를 선포하고 이를 관료적으로 제도화하려는 태도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옛말에 “빈 방도 사람이 있는 듯이 들어가라(入虛如有人)”고 했는데 온 나라에 사람이 당신들밖에 없다고 생각하는가.

김영민(전주 한일장신대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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