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신정근]아버지와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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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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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어린 시절 아버지는 고마움을 느끼지만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였다. 이제 내가 아버지가 된 상황에서 아이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생각해본다. 아마 내가 느낀 아버지와 그렇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어머니랑 소곤소곤 말하다가도 내가 끼어들라 하면 이야기의 톤이 조금 무거워진다.

이렇듯 아버지는 듬직하지만 소통이 뭔가 자연스럽지 못한 거북한 존재로 비친다. 가정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도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거북한 존재들이 어설프게 소통을 시도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우리 사회가 발전을 했어도 활기가 떨어지는 게 아닐까.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버전의 아버지 이야기가 생겨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학교 다닐 때는 음악시간에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로 외웠다. 사회적으로 누가 건국의 아버지이고 근대화의 아버지인지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는 역사에 족적을 남긴 사람들의 몫이므로 모든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늘 듣는 아버지 이야기로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권위주의 버전이 있다. 아버지는 집안의 경제를 책임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아버지의 말은 곧 법이었다. 그 말에 대거리를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아버지는 말보다는 기침으로 의사를 전달하고 꼭 말을 해야 하면 완전한 문장보다 단문이나 명사형으로 뜻을 나타냈다. 밥 먹을 시간이 되면 ‘밥!’으로 충분했다.

대화에 끼어들면 분위기 무거워져

가련한 주인공 버전이 있다. 이 이야기는 나라살림이 어려워지면서 가계가 쪼들릴 때 자주 등장한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시절에 언제 직장에서 잘릴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실제로 해고되고서도 집안에 말도 못하고 공원을 전전하던 서사로 확대 발전됐다. 가련한 주인공은 짊어져야 할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점에 늘 미안하면서 속마음을 입 밖에 끄집어내지 않는다. 간혹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음주 뒤에 울분을 토하며 주위와 소통을 하고자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권위주의와 가련한 주인공은 차이가 있지만 불통의 측면에서 똑같다. 둘 다 말을 마음에 담아둘 뿐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은 표정과 분위기를 통해 자신의 심정을 내비치고 상대가 그것을 알아듣기를 바란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다 보면 두 버전의 아버지와 소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쿵 하면 담 너머 호박 떨어지는 소리인 줄 알아차리는 것처럼 권위주의 버전의 기침 한 번이 호출을 뜻하고 가련한 주인공의 주방 출입은 술을 찾는 것이다. 두 유형이 친숙하지 않은 공간에 들어서게 되면 그들이 얼마나 분위기를 딱딱하게 만들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와 다른 달변형 아버지 버전이 있다. 노래방에 가면 마이크를 놓지 않는 사람처럼 달변형은 한번 이야기가 시작됐다 하면 끝이 없다. 달변형은 먼저 말솜씨가 좋다. 들어보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말을 잘도 꾸며내서 지치지도 않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특히 달변형이 사회적인 성공 스토리에 끼일 만한 주인공이라면 말을 하는 단계를 넘어 말을 즐기게 된다. 이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친한 사이가 아니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지만 달변형은 자신이 겪었거나 주위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즐겨 화제로 삼는다. 간혹 낯 뜨거울 만한 소재도 보란 듯이 영웅담으로 각색해서 이야기한다.

보통 사람은 모임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걱정하지만 달변형은 모임의 성격에 따라 주제를 선점하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선거철이면 정치를, 스포츠 시즌이면 운동을, 첨예한 논쟁이 있으면 사회적 이슈를 던져놓고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이도 저도 아니면 연예인 사생활을 본 듯이 말한다.

절정은 달변형이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해 모두가 따라야 할 만한 교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 “나 같은 사람도 했는데”, “내가 해보니까” 등이다. 내가 자랄 때 자식이 뭔가 잘못을 하면 부모님들은 즐겨 “내가 너만 할 때는 결혼해서 애를 낳았는데”라는 말을 하곤 했다.

달변형 家長은 자기자랑만 늘어놔


선의로 해석하면 달변형은 자신을 역할모델로 제시하고 자신의 경험을 공유 자산으로 내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시대가 달라지는데도 자신의 경험을 객관적 자료가 아니라 경전화한다면, 소통하고자 하지만 소통이 되지 않는 역설적 상황이 일어나게 된다. 특히 성공한 달변형 아버지는 폐쇄회로처럼 사고와 행위 방식이 양식화돼 자신과 다른 이야기를 잘 듣지도 못하고 다른 것에 불편해한다. 특칭하자면 50대 남성의 성공담이 군대이야기처럼 되어가고 있다(50대 남성은 상징이다).

나도 학창시절에 하루 종일 한마디를 할까 말까 하고 글이라면 무서워 피하기 일쑤였다. 이태원의 “우리는 말 안 하고 살 수가 없나 날으는 솔개처럼”의 노랫가락을 읊조리며 스스로 위로하곤 했다. 요즘 나도 모르게 “나처럼 말 못하는 사람도 말로 먹고 살지 않느냐?”라며 학생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려 하고 있다. 스스로 깜짝 놀란다.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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