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반칠환]숲 속 식구들은 모두 돕는다

  • 입력 2008년 5월 17일 02시 58분


나는 종종 배낭을 메고 산으로 향한다. 바람에 하얗게 뒤채는 앞산의 저 이파리들은 갈참나무들이다.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거리는 저것은 은사시나무들이다. 해마다 바라보는 엄연한 일이지만 올해도 믿을 수 없었다. 겨우내 벌거벗고 선 앙상한 겨울 산들을 점묘법으로 칠하겠다고 나선 봄바람을 보고 코웃음 쳤었다. 하지만 눈에 띌 듯 말 듯 나뭇가지마다 쌀알만 한 초록 점을 찍던 봄바람은 마침내 온 산을 다 가리고도 남는 녹색 차일을 쳐 놓은 것이다.

물론 폭죽처럼 터지는 봄꽃들의 축제도 빼먹지 않았다. 지난가을, 멋모르고 벚나무 우듬지에 새 집을 지은 까치 부부가 꽃불에 눈이 멀어 망연히 앉아 있는 모습도 종종 보았다. 오월의 녹음은 봄꽃에 눈먼 새들의 시력을 되찾아 주는 명약이 분명하다. 봄새들의 울음과 여름새들의 울음이 다르다.

바람에 흔들리는 숲은 한 마리 짐승이다. 나는 그 짐승의 푸른 터럭 속으로 들어간다. 아까시나무, 밤나무, 쉬나무, 피나무, 신나무, 국수나무, 잣나무, 생강나무, 백당나무, 광대싸리, 조록싸리…. 나는 언제나 자리를 바꾸지 않고 서 있는 이 산의 나무들을 순서대로 다 욀 듯하다. 작년부터 ‘숲 생태’를 공부하고 있는 나는 계곡을 낀 등산로에 피어 있는 들풀들도 낯설지 않다. 20여 분 더 올라가다 보면 언제나 감탄하며 바라보는 나무가 하나 있다. 아름드리 갈참나무 한 그루가 그것이다.

나를 가르쳐 주신 숲 선생님에 따르면, 오직 참나무 한 종만을 생명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생명이 무려 50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이것은 참나무 한 종이 산에서 사라지면 이들도 같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나무의 잎과 열매를 먹이로 하거나, 껍질을 집으로 삼거나 하는 그 50여 종의 생물은 또 각각 얼마나 많은 다른 나무와 짐승과 곤충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가. 그 관계의 그물을 하나하나 짚어가다 보면, 나 또한 이 참나무와 무관하지 않을 것임을 새삼 생각하여 보곤 한다.

요즘 들어 부쩍 나무와 들풀에 관심을 갖고 산과 들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생태적 감성이 요즘의 유행이라서? 맛있는 나물로 웰빙 식단을 차리려고? 약용 식물로 불치의 지병을 고치기 위해서?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저 나무와 들풀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찾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는 그것이 ‘숲의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을 당기는 ‘숲의 구심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숲은 우리를 부른다. 그러나 단지 그늘에 와서 쉬고, 꽃구경을 하고, 맛난 열매를 실컷 따 먹으라고 부르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가만히 귀기울여 보면 ‘나는 너다, 너는 나다’라고 속삭이고 있는 듯하다. 숲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상호 연관성이다. 숲 속의 어떤 식물도 저 홀로 싹 틔우고, 꽃 피우고, 열매 맺을 수 없다. 모두 저 아닌 것들의 도움으로 한껏 저다운 꽃을 만발해 낸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것이 파편화되어 있다. 오늘 아침 내가 먹는 음식, 내가 마시는 물, 내가 입는 옷이 어떻게 얻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과정은 모두 숨어 버리고 오직 현금으로 교환되는 물건만 오고 갈 뿐이다. ‘너와 나 사이, 관계의 길’이 막혀 있는 세상이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광우병 소만 해도 그렇다. ‘너와 내가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야만적인 축산과 상거래가 일어나는 것이다.

갈참나무가 수많은 제 이파리 경전을 부채 삼아 부쳐 주며 말한다. ‘너를 나로 생각한다면 공경하지 않을 대상이 어디 있겠느냐’고. ‘우리가 서로 연관된 존재라는 걸 망각하는 순간 병이 든다’고. 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갈참나무 아래에서 물병을 마저 비우고 일어섰다.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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