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갑수]본좌 찾는 사회

  • 입력 2008년 2월 2일 03시 00분


허본좌는 구속됐고 나본좌는 탁자 위에 올라가 허리띠까지 풀어야 했다. 명색이 본좌라는 데 꼴이 말이 아니다. 자랑 삼아 털어놓지만 중학교 때 나도 잠시 본좌였다. 무협지에 열광하는 아이들끼리 여러 문중을 만들었는데 ‘금륭십이지 구대문파’ 장문인 자리에 올라 본좌가 된 것이다. 새내기 여선생님이 그 까부는 꼴을 못 봐 벌을 줬다. 망신당하는 본좌의 기분, 그래서 나도 안다. 본좌는 장엄하되 무너지는 뒷모습은 개그다. 그럼 본좌에 대한 열광의 분위기는 무언가. 그 모습도 역시 개그와 다름없다. 말하자면 무대와 객석이 함께 연출하는 협동개그다. 즐겁지 아니한가?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허경영 본좌는 황당 본좌다. 의회민주주의, 지방자치, 모두가 쓸데없는 헛짓이요, 낭비란다. 외계인과 교신하는 재벌가 양아들 출신의 본좌께서 아이큐 430의 초능력 신검을 휘두르면 만사형통이란다. 와우! 초중고교생들의 우상 되시겠다.

나훈아 본좌는 수컷 본좌다. 꿈틀대는 짙은 눈썹 휘날리며 웃음인지 찡그림인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벽력같은 호통을 내지르면 순하고 여린 사람들의 가슴은 사무침에 일렁인다. 헛소문 따위는 싹 무시할 수 있었지만 억울한 소문에 휩싸인 젊은 처자들이 안쓰러워 몸소 나섰다. 연약한 암컷을 목숨 걸고 지켜주는 수컷의 장엄! 중년들의 우상 되시겠다.

목하 본좌 대망의 시대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자꾸만 새 본좌를 발굴하고 치켜세운다. 왜? 본좌는 꿈이요 포스요 재미니까. 그런데 그것은 진정일까 역설일까 아니면 어떤 냉소의 변용일까.

추측 1: 에너지 보존의 법칙; ‘잘 살아 보세!’의 총동원 열기가 ‘독재타도!’의 민주화 열기로 전환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막을 수 없는 사회 에너지였다. 마침내 목적은 달성됐으나 에너지는 고스란히 남았다. 세상을 뒤엎던 힘이 갈 곳 몰라 하다가 대리만족거리, 본좌를 찾는다.

추측 2: 퇴행성 관절염; 노쇠 및 과체중과 관계 깊다. 비장, 처절했던 현대사의 거대담론을 통과하는 동안 한국인은 지치고 조로해 버렸다. 경제성장으로 몸집은 뚱뚱한 가죽부대가 돼버렸다. 비만한 육체 속의 겉늙은 영혼은 그저 귀찮을 뿐이다. 속없이 즐겁고 싶을 뿐이다. 의식의 퇴행이 또래 친구들을 부른다. 얘들아, 우리 본좌놀이 하자!

추측 3: 허무한 인생; 양극화. 더는 인생역전, 반전의 대박 드라마란 없다.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쳐 봐야 거기서 거기일 뿐. 오, 허무한 인생이여. 삐딱하게 흘겨보고만 싶은 세상일이여. 허무는 냉소를 부르고 냉소는 난데없이 초능력을 주장하는 대통령 후보에게 내던지듯 표를 안긴다.

본좌로 추대된 당사자들의 기분은 어떨까. 나본좌는 좀 기막혀 할 것 같다. 나는 스스로 무엇을 한 적이 없다. 당신네들 멋대로 들었다 놨다 하지 않았는가, 하고. 그러나 나본좌, 은둔의 신비와 마초형 카리스마로 누릴 것 충분히 누리고 있으니 분통일랑 삭이시라. 허본좌는 구속에도 불구하고 꽤 즐거워할 것 같다. 스스로 본좌 놀음의 각본, 연출, 주연까지 도맡았는데 엄청 성공한 흥행 아닌가.

본좌는 재미다. 영웅 대망이나 메시아니즘과는 다른 유희적 성격의 유행현상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간혹 본좌의 충성스러운 신하들도 목격된다. ‘나훈아 선생을 모독하지 말라’ ‘허경영 구출 결사대 모집’ 같은 인터넷 글에서 그 기미가 보인다. 이때부터는 대중예술의 옹호나 기인을 받아들이는 사회적 유연성을 넘어선다. 종래의 진지한 것, 의미 있는 행위가 하찮게 보이는 역전 현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엔터테이너를 우상 숭배하는 듯한 분위기에서 참 알쏭달쏭한 기분을 느낀다.

김갑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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