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서유석]길게, 전체를 보자

  • 입력 2004년 11월 5일 18시 20분


코멘트
군자의 조건을 역설한 ‘논어’의 대목들 가운데 ‘군자 유어의(喩於義) 소인 유어리(喩於利)’란 구절이 눈에 띈다.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는 뜻이다. 소인 잡배는 늘 눈앞의 이익만을 따지지만 군자는 옳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공동체의 미래를 염려한다는 지당한 이야기다. 특히 지도자가 될 사람은 수양을 통해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실제 세상은 전혀 다르다. 나의 이익, 내 집단의 이익만 따지는 소인의 세상이 점점 노골화되고 있다. 식자층이니 지도층이니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럴듯한 명분과 논리로 위장된 이기주의라, 소인들의 솔직한 그것보다 더 위선적일 때가 많다.

국가 혁신 프로그램의 핵심 사안들(지방분권, 지역혁신, 행정수도 이전)이 휘청거리고 있다. 충분한 여론 수렴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미비했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그 중요한 국가적 과제의 추진을 가로막고 있는 결정적 장애는 정치권과 자치단체(장)의 이해 다툼이 아닌가 싶다. 논리로 포장돼 있지만 속셈은 차기 선거에서의 유·불리뿐이다.

개혁입법의 추진 전망도 그리 밝지 않다. 보수와 기득권 집단의 반발이 만만치 않은데다, 어려워진 경제상황 탓인지 국민의 마음이 조급해지고 판단마저 흐려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다. 각종 이해집단의 서로 다른 요구도 봇물 터지듯 쏟아진다. 과거의 왜곡된 관행을 개혁하는 과정에서의 불가피한 마찰이라는 낙관적인 진단도 있다. 하지만 최근의 심각한 갈등과 이기의 노골화는 개혁은커녕 과거로의 회귀를 염려하게 한다.

공산주의를 꿈꾸던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그람시는 자본주의의 장기화가 국민의 도덕적 동의로부터 힘을 얻고 있음을 인정한 사람이다. 사회주의도 그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하면 전진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개혁도 마찬가지다. 대화와 설득, 토론과 비전 제시를 통해 보다 많은 동의를 얻는 일이 우선이리라.

하지만 사회의 변화는 법과 제도의 변화만으론 부족하다. 소위 지도층과 국민의 의식도 변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법과 제도의 변화는 무의미하거나 아예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물론 나의 이익을 버리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모두가 산을 개간해 자기 밭 넓히는 데만 몰두하면 숲은 허물어져 민둥산이 되고 결국은 홍수와 가뭄으로 공멸하게 된다. 만인의 단기적 이익 추구는 결국 그 의도까지 좌절시킨다. 이제 우리 모두 잠시 길을 멈추고 눈을 들어 ‘길게 보고 전체를 보는 이익 계산법’을 배워야 한다. 서로 협의하고 공동의 이익, 미래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아야 한다.

한마디로 군자의 길이 무어냐고 묻는 제자 자공에게 공자가 말한다. “서(恕)다. 곧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은 것이다(己所不欲勿施於人).” 학생을 가르치면서 교양으로서의 철학은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늘 고민한다. 과거의 허물을 터는 데 주저함이 없고 타자와 약자를 배려하는 가운데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나의 이익, 내일과 다음 세대의 복지까지 고려하면서 이익을 따지는 성찰의 문화가 아쉬운 때다. 아마도 그것이 군자의 의(義)요, 21세기 시민의 길이고 모두가 익혀야 하는 교양철학의 과제라는 생각을 해본다.

서유석 호원대 교수·철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