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칼럼]공천개혁 "국민개혁 속이는 짓이지"

  • 입력 2000년 2월 18일 19시 23분


지난 80년 가을 장차 여당이 될 민정당을 보안사가, 제1야당이 될 민한당을 안기부가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던 때의 삽화다. 그 이전엔 야당의 지도자였던 운경 이재형(雲耕 李載灐)이 민정당 창당의 대리역을 맡으면서 자신을 따랐던 한 40대의 전직 정치부 기자에게 민정당에 입당해 11대 국회의원 총선에 나설 것을 권유하자, 그는 “제가 그래도 유신정권에 맞서 언론자유운동을 했었는데 어떻게 민정당에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왕이면 야당 공천을 주선해 주시지요”라고 대답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정객 운경의 응구첩대가 일품이었다. “이 사람아. 이 판에 여야가 어디 있나. 다 국민을 속이는 짓이지.”

미국의 한반도전문가였던 고(故) 그레고리 헨더슨은 명저 ‘한국정치론’에서 한국정치를 ‘소용돌이의 정치’로 파악했다. 물이나 바람이 하나의 중심을 향해 빙빙 거세게 돌 듯이, 한국인들은 중앙의 권력을 향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거센 투쟁을 벌인다는 뜻이었다. 60년대 후반에 나온 이 이론이 오늘날에도 타당하다고 보지만, 그러나 그 정치적 투쟁의 기법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속임수였다. ‘소용돌이의 정치’ 못지 않게 ‘속임수의 정치’가 한국의 정치를 지배해 왔던 것이다.

그 사례들이야 많지만, 우선 5·16쿠데타세력의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한다”던 속임수를 꼽을 수 있다. 조기(早期)이양은커녕 결국 18년 장기집권으로 이어지지 않았던가. 71년 대선 때 수세에 몰렸던 박정희(朴正熙)전대통령의 장충단 연설, 즉 “내가 국민 여러분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연설은 ‘속임수 정치’의 극치였다. 장기집권에 염증을 내던 일부 유권자들을 “더 이상 안 하겠다고 하니 이번 한번만 더 봐 주자”로 돌아서게 만든 이 표현은 이 때 이미 구상중이던 간접선거를 염두에 둔 암수(暗數)였다. 실제로 그는 그 다음 해에 출범한 유신체제 아래 한 차례도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한 일이 없었기에 형식논리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은 셈이 됐지만, 국민이 이 암수를 미리 알았더라면 그의 득표는 훨씬 줄었을 것이다. 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 등 12·12쿠데타세력의 ‘속임수 정치’는 차라리 저질이었다. 겉으로는 ‘정의사회의 구현’을 되뇌는 속임수를 쓰면서 실제로는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하고 있었다. 문민정부도 예외가 아니어서 칼국수로 청렴을 위장하는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하게 돈을 모으다가 나라살림을 거덜내다시피 했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뒤 여당은 물론 야당들도 모두 정치개혁을 부르짖었다. 특히 16대 총선을 앞두고는 너나할것없이 공천개혁을 앞세웠다. 늘 속았으면서도 그래도 새 세기, 새 천년대의 첫 해에 치러지는 총선인 만큼 시대의 흐름에 맞게 개혁이 선행되려니 하는 기대가 컸음이 사실이다. 더구나 여당의 경우엔 수십년에 걸친 민주화투쟁의 큰 기둥 세력인 만큼 역대 어느 여당보다 정치개혁의 모범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어제와 그제 발표된 여야의 공천자 명단은 노력의 흔적이 보이기는 하지만 개혁과는 거리가 멀어 그 밥에 그 나물이다. 우선 지난날의 통폐인 보스중심의 밀실공천이 여전해, 위헌론마저 제기되고 있다. 도대체 대명천지에, 더구나 민주주의의 발전을 자랑하는 이 공개정치의 시대에 공천의 장소들은 어째서 국민 앞에 투명성 있게 밝혀지지 않는가. 게다가 계파 갈라먹기는 계속됐고, 언론에 발표된 공천심사위원회는 장막 뒤에 가려진 실세들의 장식품일 뿐이라는 공천지망자들의 지적이 사실이지 않은가. 검은 돈 거래는 없었는지. 결국 정치권의 부패에 대한 국민의 반발을 잠시라도 가라앉히려고 개혁이란 말로 속임수를 썼던 것이 아니냐는 허탈감이 남는다.

정치개혁은 ‘속임수 정치’에 능한 정치인들에게만 맡겨지기엔 너무나 중요한 과제다. 시민운동 단체들의 난립을 염려하면서도 그들의 분노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정말 유권자들이 후보자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중심으로 엄정하게 심판하는 길밖에 다른 지름길이 없다. 실제로는 혼탁선거로 가면서도 겉으로는 공명선거를 외치는 또 하나의 ‘속임수 정치’도 유권자가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김학준<본사 편집논설고문·인천대총장>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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