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 칼럼]낡은 정치제도는 깨져야 한다

  • 입력 2000년 1월 14일 18시 50분


영국에서는 1780년 이래 매년 엡섬에서 최고의 경마대회가 열리는데 이 대회를 창설자의 이름을 따 더비대회라고 부른다. 영국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 대회는 숱한 일화들을 낳았지만 그 가운데 으뜸은 아마도 1913년에 일어났던 여성참정운동가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의 참사일 것이다. 그녀는 말들의 경주가 절정에 다다랐던 시점에 여성의 참정권을 부르짖는 3색의 옷을 입은 채 국왕의 말 앞에 뛰어들어 짓밟혀 죽음으로써 여성참정권 운동에 분수령을 이뤘다. 32세의 젊은 이 여성의 장례식에는 전국에서 수많은 동조자들이 운집했으며, 그들의 함성은 마침내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주게 만들었다.

▼시민단체 낙선운동은 대세▼

세계사를 살펴보면 어떤 운동에서 분수령이 형성될 때는 이처럼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곤 했다. 현상타파 또는 현상변경을 요구하는 운동에서는, 특히 자기희생적인 사건을 통해 대중의 관심과 분노가 결집돼 역사적 돌파구가 마련되곤 했다. 합법적이고 순조로운 토론과 결정의 과정을 거쳐 역사발전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면 더 바람직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만, 이해관계의 날카로운 대립 속에서 힘있는 기득권층이 조금도 양보하려 하지 않을 때는 불가피하게 파율적(破律的) 행위가 요청되기도 했다. 그 행위는 물론 뒷날 정당성을 획득한다.

최근 시민운동단체들이 벌이는 낙천 낙선운동은 명분으로서는 누구도 반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충분히 이해되지만 유감스럽게도 분명히 법을 어기는 행위이다. 사회단체의 선거개입을 금지한 선거법 제87조에 명백하게 도전하는 것이어서, 운동가들 스스로 선거법 위반으로 감옥엘 가게 돼도 달게 받겠다고 공언한다. 비장성(悲壯性)에서는 목숨까지 버린 데이비슨 여사에 비교가 되지 않지만, 현재 각 정당의 국회의원 공천 제도와 관행에,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 제도와 관행에 그들이 강도 높게 계속해서 맞서 싸울 것임을 예고한다. 국민 여론도 압도적으로 그들을 지지한다. 각종 조사는 국민 여론이 약 7대 3의 비율로 이 운동을 찬성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완강히 저항하기만 하던 정계 일각에서도 뒤늦게나마 동조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여론의 대세를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반적으로 보아 이제 임계질량(臨界質量)은 확실히 형성됐다. 물리학에서는 핵분열 물질이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최소의 질량을 임계질량이라고 부르는데, 공천을 포함한 오늘날의 국회의원 선거 제도와 관행을 본질적으로 개혁하지 못하는 경우 유권자들이 주권자의 힘으로써 그것을 이룩해내야 한다는 시민운동에 임계질량이 형성됐다는 뜻이다. 이렇게 볼 때 정치권 스스로 발빠르게 시민운동의 요구에 발맞추어야 한다. 선진 민주국가들이 모두 유권자의 낙천 낙선운동을 법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터에 우리만 그것을 금지해 놓고 피난처를 찾으려 할 것이 아니라 우선 그 법부터 고치는 금도(襟度)를 보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고질적 정치부패와 늦어진 정치개혁에 대해 진심으로 참회하는 자세를 보여줌과 동시에 밀실 공천, 계파 나눠먹기 공천, 낙하산 공천, 헌금 공천 등을 모두 버려야 하며, 돈 선거는 물론 지역감정유발선거 등도 과감히 청산해야 한다. 보스 1인 지배체제나 과두지배체제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간단히 말해 ‘개혁 이니셔티브’를 정치권이 먼저 취함으로써 뒷날 볼썽사납게 개혁을 강제당하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다.

▼정치권이 개혁 주도해야▼

다른 한편으로 시민운동가들도 자신들에게는 흠이 없는지 진지하게 돌이켜보아야 한다. 그들 가운데는 정치권에 기웃거리다 좌절되자 시민운동을 발판삼아 뒷날 정치권에 진입하려는 사람은 없는지, 오만과 독선에 빠져 남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은 없는지, 부당하게 운동자금을 받은 일은 없었는지 새삼스레 주변을 점검해야 하겠고,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과거와 경력을 소상히 밝히는 것이 순서이겠다.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라는 정치학의 오랜 명제가 지닌 참뜻이 무엇인가를 이제 국회에 대한 감시자임을 자처한 그들 스스로 헤아려야 할 것이다.

이제 낡은 정당-선거 제도와 관행이 깨져가고 있음은 확실하다. 거기서 터져 나오는 파열음이 민주정치의 전진을 위한 행진곡이 되도록 정치권과 시민운동권이 지혜와 힘을 모으는 것이 좋겠다.

김학준(본사 편집 논설고문·인천대 총장) 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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