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상우]설날 아침에 만나는 ‘새로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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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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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우 소설가
박상우 소설가
설날이 다가올 때마다 느끼는 불만이 있다. 우리의 대표적 전통 명절인 그날을 아무 생각 없이 구정(舊正)이라고 부르며 신정(新正)과 구별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新)과 낡은 것(舊)을 차별할 때 사용하는 어법이 바로 그것인데 그것을 처음 사용한 주체는 일제강점기의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은 조선 문화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음력설에 차례를 지내거나 방앗간에서 떡을 만들 경우 처벌하기도 하고 세배를 다니기 위해 흰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오징어 먹물을 넣은 물총을 쏴 옷을 더럽히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숱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설날은 맥이 끊기지 않았다. 하지만 광복 뒤에도 구식 타파와 이중과세 방지라는 미명하에 전통 명절은 쉽사리 복원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과 유신정권 때까지 신정을 유지하다가 1985년 ‘민속의 날’로 명명해 하루를 공휴일로 정하고 1989년 비로소 ‘설날’이라는 공식 명칭을 부여해 90년 만에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그렇게 굴곡진 설날의 배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도 이 땅에서는 ‘설날’이라는 좋은 명칭보다 신정과 구정이라는 강점기의 잔해가 무감각하게 쓰이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서기 488년 신라 비천왕 시절부터 설날을 보냈다는 삼국유사 기록으로 미뤄 그것의 전통성에 대해서는 중언할 필요가 없을 터다. 하지만 전통적인 설날 풍경과 지금 우리가 보내는 21세기 설날 풍경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깊고 아득한 거리감이 있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 유지되던 윷놀이 널뛰기 연날리기 같은 풍경은 이제 시골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한복을 입고 동네 나들이를 하거나 세배를 다니는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전통적인 놀이나 풍속 대신 현대인들의 손에는 설날 아침에도 여전히 휴대전화가 들려 있고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다. 일가친족을 만나 오랜만에 대화의 꽃을 피우는 것보다 SNS를 위시한 모바일 세상에 몰입해 주변인은 건성으로 대하고 네트(NET)상의 실시간적 관계에 중독적인 집중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설날은 전통과 현대, 선대와 후대 사이의 공존을 되새기며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특별한 명절이다. 떡국 한 그릇 먹고 나이 한 살 더 먹는 일을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그것이야말로 철없는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지상에 태어나 인생을 살아가며 차곡차곡 쌓아가는 연륜이 얼마나 소중한데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동안(童顔)에 열광하고 성형이니 S라인 따위에 정신을 팔며 경륜이 가져다주는 지혜의 보물을 외면하는지 모를 일이다. 나이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그것은 자각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의 흐름일 뿐이다. 나이를 의식하지 않게 되니 삶과 죽음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인생의 풍파에도 넉넉한 대처 능력을 얻게 된다. 견성이 더 깊어져 인간의 본성을 발견한 사람은 나이를 초월한 정신적 자유를 얻어 천진난만한 동심으로 세상을 살게 된다.

‘설’의 몇 가지 어원 중에 대표적으로 꼽히는 것은 ‘익숙하지 못하다’는 의미다. 그것은 곧 ‘낯설다’는 것이니 새해, 한 살 더 먹은 ‘새로운 나’를 만나는 날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새해 첫날, 나를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은 얼마나 신선한가. 괴롭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새로운 한 해의 진로를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변명과 타성의 노예가 돼 살아가는 나, 남들에게 관심과 관용보다 짜증과 비난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나, 자기 욕망의 노예가 돼 이타보다 이기를 앞세우며 앙앙불락하는 나를 발견하는 ‘설’은 아프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껴안음으로써 새로운 나를 탄생시키는 전환의 계기를 만들 수 있다. 낯선 나를 발견하고 새로운 나를 설계하는 날, 모두에게 그런 설날이 되기를 기원하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박상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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