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이도성/도청과 네탓

  • 입력 1999년 10월 20일 18시 29분


정국 최대의 쟁점이 되고 있는 ‘도청(盜聽)’ 관련 논란을 지켜보면서 새삼스레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기형적(畸形的)인 우리 헌정구조에서 파생되는 정치적 인식의 혼란이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5년, 국회의원의 임기를 4년으로 규정해 놓았다. 즉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같은 시기에 국민적 심판을 받고 여야가 재정리되는 것은 20년 만에 한번이고, 그동안은 계속 엇갈려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97년 대선 결과처럼 정권교체가 되는 상황에서는 ‘여’‘야’‘구여(舊與)’ ‘구야(舊野)’가 어지럽게 뒤섞여 비정(秕政)의 책임을 누가, 어디까지 져야 하는지 좀처럼 갈피를 잡기 힘들게 돼 있다.

최근 야당인 한나라당이 제기하는 국가정보원의 불법 탈법적 대민(對民)도청 의혹이나, 여당인 국민회의측이 내세우는 반박논리가 혼란스럽게 전개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이같은 기형적 헌정구조가 남긴 산물(産物) 중 하나다.

우선 한나라당의 문제제기는 정치적 목적을 띤 ‘국내 주요인사에 대한 도청’ 등이라는 점에서 야당으로서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임에 분명하다. 같은 맥락에서 국정원측이나 여당이 내세우는 ‘안보논리’가 오히려 군색하게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마치 난생 처음 발견한 비정인 양 정색을 하고 여측을 몰아붙이는 태도만으로는 국민을 충분히 납득시키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굳이 여측의 대야 공격논리를 빌릴 필요도 없이 한나라당이 집권세력이었을 당시에도 정치적 목적의 도청이 엄존했다는 게 국민들의 일반적 ‘심증(心證)’임을 한나라당도 스스로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몇마디 ‘자책성 고백’이라도 앞세운 뒤 “이제는 잘해보자”고 주장해야 이치에 맞는 일이 아닐까.

그러나 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여당의 반박논리다. 국민회의측 반박논리의 핵심은 “한나라당이 여당일 때는 안기부 주사가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도청했다. 이회창(李會昌)총재가 국무총리와 감사원장으로 재직할 때 도청근절을 위해 한 일이 뭐냐. 이총재와 한나라당은 과거 영장도 없는 도청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고 인권을 침해해온 세력들이다”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런 내용 자체가 사실과 동떨어진 주장이라는 게 아니다. 다만 현재 국정운영을 주도하는 여당으로서 국민 앞에 내놓을 ‘답(答)’으로서의 부적절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다. 우선 “당신들도 했는데 무슨 소리냐”는 식으로, 논란의 핵심인 대민 도청의 존재여부를 호도(糊塗)하려는 방책(方策)의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과거 여당’로서의 한나라당과 ‘현재 야당’로서의 한나라당을 ‘편의주의적’으로 구분함으로써 초래되는 정치적 인식의 혼란, 더 나아가 국정의 상당부분에 대해 ‘야당’의 견제기능과 역할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논리가 지니는 문제점이다.

‘국민회의식’ 논리대로라면 기형적인 헌정구조는 고스란히 기형적인 여야관계로 귀결되고, 자칫 민주주의의 본질이 훼손되는 ‘위험한 정치’로 치달을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매우 복잡다기한 논리와 주장들이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이기는 하나 일단 ‘오늘의 여야관계’는 97년 대선을 분기점으로 재정리하는 게 순리다. 국민회의측 주장대로 한나라당은 과거의 비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정운영의 주도세력에서 밀려났고, 국민회의는 그러한 비정의 광정(匡正)에 대한 ‘기대’ 때문에 집권세력으로 선택된 것이다. 국민회의가 집권 2년 가까이 되도록 계속 ‘과거 여당’ 탓으로 지샌다면 국정운영 주도세력으로서의 자질과 역량에 대한 의구심만 키울 뿐이다.

이도성<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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