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호인수/진짜가 없는 세상

  • 입력 1999년 9월 27일 01시 09분


제대로 모양을 갖춘 청과시장이나 국도 변에 줄줄이 늘어선 간이 과일가게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꿀참외 꿀수박 꿀복숭아가 한창이더니 금세 꿀포도 꿀배로 품종이 달라졌다. 온갖 종류의 과일들이 계절 따라 바뀌는데 유독 달라지지 않고 감초처럼 어디든 붙어있는 것이 ‘꿀’인가 보다. 꿀이 모든 맛과 향기의 대명사라도 된다는 건가. 아무튼 ‘꿀’자 안 붙은 과일이 없는 것으로 보아 ‘꿀’은 이미 애교스런 액세서리 수준을 넘어선 과대 포장임에 틀림없다. 그러면서 ‘꿀’은 ‘꿀’아닌 것들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며 그것들을 철저히 ‘꿀’의 영역 밖으로 내몬다. ‘꿀’이 아닌 것은 단연코 거짓이라고 선언한다. 그러고 보면 ‘꿀’이 점점 섬뜩해진다.

◇간판마다 '원조' 일색

언제부터였나, 큰 길, 골목길 할 것 없이 음식점 간판마다 너도 나도 ‘원조’를 붙이기 시작한 것이. 마포에 가면 주물럭집들이 하나같이 다 원조이고 포천에 가면 원조 이동갈비집들이 수도 없다. ‘원조’ ‘진짜 원조’ ‘원조 중의 원조’ 등을 큼직하게 써 붙인 숱한 간판들은 우리 업소의 우리 음식만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진짜라고, 원조라고 해서 다 원조가 아니니 원조가 아닌 것들에 속지 말라고 저마다 목에 핏줄을 세운다. 소문 듣고 모처럼 맛난 음식 한번 먹으려고 어렵사리 집을 나선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오랜 전통을 지닌 ‘원조’는 당연히 오직 하나 뿐일 것을 모두 다 원조라니 원조라는 말 자체가 신용을 잃게 됨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사기와 같은 말 정도로 추락한다. 우리는 언제부터 ‘원조’를 이토록 좋아했나. 원조 좋아하다가 원조에 속고 원조 때문에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벌써부터 내년 봄에 있을 총선을 겨냥한 개인이나 정당의 사전 포석이 분주하다. 우리 당만이 이 나라의 정통 맥을 이어온 원조 중의 원조이며 우리(나)만이 오직 참신성과 전문성과 도덕성을 두로 갖춘 ‘꿀대표’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또 실추된 이미지 쇄신을 위하여 신당도 만들고 합당도 해서 이제 더 이상은 영남 호남당 아닌 명실공히 당당한 전국정당을 만들겠다고 큰소리 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것이 간판에 으레 붙어다니는 ‘꿀’이나 ‘원조’라는 말이 주는 의미 이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간 새 이름의 당과 인물이 출현할 때마다 매번 비슷비슷한 걸 보고 들어온 때문이다. “아! 과연”하고 감탄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겉치레 앞서면 불신만

나는 간판이 너무 화려하거나 요란한 집의 음식이 겉보기와는 달리 별로 신통치 못한 걸 여러번 경험했다. 오히려 금방 눈에 띄지 않는 조금은 낡고 허름한 골목집에서 의외로 맛있고 깔끔한 음식을 맛볼 때가 있다. 그런 집은 대개 간판에 ‘원조’가 붙어 있지도 않다.

나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묻지도 않는 말에 독실한 천주교 신자, 특히 교회 단체의 간부임을 강조하고 나서는 사람은 일단 제쳐두는 못된(?) 버릇이 있다. 상대방이 물건을 팔거나 일감을 얻으려는 사람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꿀’이나 ‘원조’를 내세우는 사람치고 보이지 않는 속도 꿀이요 원조인 사람을 별로 못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나의 이런 버릇 때문에 후회한 적은 거의 없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국정에 관한 본인의 업적이 홍보 부족으로 국민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을 항상 애석해 한다고 한다. 나는 능력껏 최선을 다했는데 알아주는 사람은 없고 그저 시큰둥한 반응만 보인다면 천하의 거인인들 속이 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이 준 인권상 메달을 목에 건채 비행기에서 내려 귀국 인사를 하는 모습은 어쩐지 좀 찝찝했다. 어쨋거나 그런 대통령이 인권 존중의 큰 걸림돌인 국가보안법을 놓고 사방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오늘도 명동성당 골방에서는 천주교 사제들이 머리 깎고 스무날 째 단식하며 그 법을 죽이라고 쉰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참’을 보기란 이토록 어려운가.

호인수(인천 간석2동 천주교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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