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지명관/엄마가 돼 돌아온 「한총련」

  • 입력 1998년 9월 6일 19시 35분


“이제 어머니로서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떳떳한 삶을 살아가겠다.”

8월19일, 91년에 한총련을 대표해 평양에 들어갔던 박성희씨가 7년만에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귀국하면서 던진 말이다. 그들이 마치 거기에 구원이 있는 듯해서 찾아갔던 북녘 땅은 ‘획일적’‘반민주적’이었고 입으로는 통일을 말하지만 ‘체제 수호에만 급급할 뿐’ 사실은 통일을 가로막고 있다고 느꼈다는 것이었다.

▼박성희씨의 귀국소감▼

그래서 그들의 일행 다섯명은 “국민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라고 하면서 “우리와 같은 불행한 젊은이들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고까지 했다. 이러한 말들이 근래 드물게 내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역시 아름다운 감성을 지닌 젊은이들이었다. 90년대 초까지 민주주의가 억압된 채 모두가 신음할 때 그들은 남쪽 땅이 흑암(黑暗)이라고 단순하게 판단했다. 그리고는 북쪽 땅은 이상향은 아니라고 해도 보다 보람있는 곳일 거라고 상상했다. 마치 50여년 전에 조국이 남북으로 분열됐을 때 북에서는 남을, 남에서는 북을 이상향이라고 그리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월남했고 월북했던 것처럼.

그리고 나서 남에서 북에서 고뇌하며 몸부림치던 그들을 잊을 수가 없다. 다행하게도 박성희씨 일행은 그리운 대한민국 땅에 돌아왔지만 그들은 오늘과 같은 ‘전향’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고 지새웠을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호소할 데가 없었는지 모른다.

“우리와 같은 불행한 젊은이들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

퍽 귀에 익은 말이 아닌가.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나오지 않길 바란다’고 하던 역사가 생각난다. 그처럼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것을 후회하는가 했더니 그것은 곧 1인 영구집권의 꿈으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나서 민주주의 없는 세월이 10년, 20년 끝이 없는 것처럼 계속됐었다. 그래서 성급한 젊은이들은 남북통일을 외치면서 북녘 땅을 찾으려고까지 했다.

정말 그것은 어두운 시대였다. 그래도 그때 그 권력들은 ‘정의사회’를 구현한다느니 빈곤을 추방한다느니 심지어는 정치범 없는 사회까지 만든다고 장담했다. 그리고서는 부정부패의 극을 달렸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들과 추종자들은 누구 한사람 반성하거나 자기비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다 이렇게도 뻔뻔스러운 사회가 되었을까. 거기다가 이제는 잘 살게 해준다고 하면서 원칙도 도덕도 모두 포기한 채 영구 집권에만 급급했던 그 ‘불행한 군인’에게 이 국민이 향수를 느끼고 존경마저 바친다고 하는데 그것이 정말 사실일까. 거기서 비롯한 거짓과 부정, 불법과 폭력이 이 나라를 오늘과 같은 파국으로 몰아넣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도 간단히 역사를 망각하는 것일까.

금년은 건국 50년의 해, 그래서 ‘제2의 건국’이라고 하면서 ‘본격적인 개혁’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그 구호가 허공에 뜬 것처럼 우리 가슴에 와닿지 않는 것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IMF체제의 어려움 탓만이 아닌 것 같다. 자기비판이나 반성을 모르는 특권층 그리고 지난날의 독재 반인권 반민주를 나무라는 양식(良識)을 포기한 듯한 풍토에서 우리는 정치적 구호에 식상했고 겨레를 위하는 감동을 상실했다고 해야할는지 모른다.

그래서 조국에 되돌아오는 ‘친북성향 한총련’의 ‘국민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라는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것 아닐까. 여기에는 쓰라린 자기비판과 반성이 서려 있다. 엄마가 돼서 돌아온 한총련은 아기를 안고서 ‘다시는 네게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을게…’하고 미소지었다. 이처럼 지난날을 뉘우치면서 되돌아올 수 있는 한국, 그리고 다양한 삶을 민주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하는 한국은 북에 대한 오랜 체제경쟁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한 것이라고 해야하겠다.

▼포용의 시대 열어야▼

‘제2의 건국’이란 바로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한민국은 관대하다. 해방후 50여년, 제1의 건국 반세기의 역사는 나라를 세우고 키웠다고는 해도 서로 반목하고 오만하였으며 힘으로 억압하고 힘에 굴복하는 역사였다. 이제는 협력과 통합으로 가야 하며 탕아(蕩兒)도 되돌아오는 역사를 시작해야 한다. IMF체제라는 파국을 넘어서 우리는 증오가 아니라 포용의 시대를 지향한다. 그것 없이는 IMF체제를 극복할 도리가 없다. 김대중(金大中)정권 그리고 오늘 이 국민은 후세에 그러한 역사를 열었다고 평가를 받을 것인가. 한국인들은 21세기를 바라보면서 드디어 ‘제2의 건국’을 이룩해냈다고 역사는 기록할 것인가.

지명관<한림대교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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