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지명관/누가 이렇게 갈라놓았는가

  • 입력 1997년 11월 30일 19시 50분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에 가즈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 소리 들려올 게외다.(「새벽이 올 때까지」) 30도 못된 나이로 이국땅 일제감옥에서 숨질 수밖에 없었던 윤동주(尹東柱)의 시다. 이 운율도 이제는 망각의 그늘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것 같다. 이 시를 평론가 송민호는 죽어가는 사람이나 살아 꿈틀거리는 사람이나 모두가 백의민족(白衣民族), 한 침대에서 새벽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위정자들은 경제위기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것은 누적된 정경유착, 부정부패, 방만하고 무책임한 경영 탓이겠지만 국민자산이 일조일석에 20∼30%나 평가절하되고 국가위신이 여지없이 추락해도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나 세력은 없다. 그리고 나서 들려오는 소리란 『우리 민족은 반드시 이 위기를 극복할 것입니다』는 공허한 외침뿐이다. 그런 위정자들인데도 나라를 사랑해서 1달러, 2달러를 은행으로 들고 오는 손길로 수백만달러에 달했다고 하니 정말 눈물겹다. ▼ 윤동주가 외친 「한겨레」 ▼ 윤동주가 일제의 강압아래서 뼈저리게 느끼던 「한겨레 한마음」이라는 강한 정서는 정경유착으로 태평가를 부르던 위정자들이나 그 주변에는 없었다. 그것은 그들을 탓하기 전에 1달러 2달러를 손에 쥐고 은행을 찾아드는 손길에만 남아 있는 것일까. 왜 요즘 그처럼 불타던 민족의식 또는 민족주의는 산넘고 물건너 간 것처럼 느껴질까. 가난한 때에는 하나가 되고 부유해지면 뿔뿔이 흩어진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억압받을 때 느끼는 서로가 하나라는 감정이 밝은 햇빛 아래서 아침 이슬처럼 사라진다고도 한다. 어두운 시대의 감정을 해방의 날 바른 정치가 참다운 민족적인 일체감으로 다지고 국력으로 화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왜 이 지경에 이르렀으며 무엇이 우리 가슴에서 「한겨레 한마음」이라는 따뜻한 심장을 앗아갔을까.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한 민족의 이념이나 민족주의가 근대화니 세계화니 하는 소리높은 정치구호 아래서 낡아빠진 유물이 됐다는 말인가. 그리고 차라리 그것이야말로 낡고도 낡은 것인데도 지역주의니 지역감정이니 하면서 배타적인 결합체로 우리는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인가. ▼ 지역감정 선동 말아야 ▼ 누가 우리를 이렇게 갈라 놓았는가. 왜 우리는 「한겨레 한마음」이라는 그렇게도 귀하게 키워온 「백의」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었는가. 이것이야말로 21세기를 향한 민족의 물음이 아닐 수 없다. 머지않아 북녘땅과 한 민족을 되찾으려고 한다면 더욱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 물음을 되물어야 하겠다. 감정이란 주어지는 것이어서 어찌 할 도리가 없다고 한다면 이제 이성의 힘으로 정말 주체적으로 서로를 아끼는 그 마음을 되찾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정치가 하나의 민족, 그 이념과 힘을 되찾으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권좌를 다투는 세력들은 입으로는 국민총화라고 되뇌지만 표만 된다면 흑색선전이든 무엇이든 동원하고 지역주의, 지역감정을 선동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도대체 그 후유증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해방이 되자 국토는 남북으로 분단됐고 정치는 민족보다도 이데올로기 위주로 이 겨레를 분열시켜야 했다. 그리고 권력 유지를 위해서,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정치는 민족의 힘을 집결시키려고 하기보다는 갈라 놓으려고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지난 반세기란 「한겨레 한마음」을 배반해온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도 아직 부족하다는 것인가. 이에 대한 깊은 성찰없이 나라를 맡겠다는 세력들 앞에서 우리 국민은 한숨만 내쉬어야 하는가. 지명관 (한림대교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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