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산책]눈물없는 졸업식

  • 입력 1997년 2월 15일 20시 19분


딸아이의 고등학교 졸업식은 교정 한쪽의 바람부는 야외음악당에서 있었다. 싸아한 날씨 속에서 어깨에 햇살을 받고 앉아 있는 어린 학생들이 추워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만한 졸업식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까지 있었던 집 아이들의 졸업식이 아쉽게도 각자의 교실에서 방송 모니터를 보면서 치러졌기 때문이었다. ▼눈 붓도록 울던 친구들▼ 졸업식이 이어지는 동안 학생들은 소리내어 웃기도 했고 와와 함성을 질러대기도 했다. 그 밝은 모습들이 퍼져나가는 2월의 하늘은 잘 갈린 칼날처럼 푸르게 개어 있었다. 나라안의 어려움 속에서 요즈음 무겁게 닫혀 있는 어른들의 마음과는 달리 우리들이 길러낸 딸아이들은 맑게 갠 그 2월의 하늘보다도 더 맑고 싱그러웠다. 그 딸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이제 어느 졸업식에도 눈물은 없구나 하고. 벌써 언제인가. 드문드문 머리에 흰 서리가 얹히는 아버지로서 나는 저 먼 시절, 옛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웠을까. 졸업식이 끝나고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제 떠나가야 할 교실에 모여앉아서 그때 우리는 눈이 붓도록 울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선생님이 계셨다. 아, 선생님. 교육개혁이 발표되던 지난해 나는 아주 단순하게 같은 생각을 했었다. 졸업식에 눈물이 있을 때 거기에 진정한 스승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헤어짐으로 가슴아린 교정에서 스승과 제자의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는다면 어찌 배움과 가르침의 진정한 만남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웃음만으로 가득한 졸업식에서 이제 말 그대로 성인이 되는 졸업생 딸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가슴은 그러나 그들의 웃음만큼 가벼울 수가 없었다. 졸업식이 끝나고 꽃처럼 교정에 흩어져 사진을 찍고 있는 웃음 가득한 딸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너희들 젊은 세대가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휴대전화이며,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이 승용차라고 들었다. 그러나 지금 나라의 형편이 어떤지 아느냐. 이 정권이 어떤 정권인가를 너무나도 생생하게 일깨워준 「사건」이 얼마전에 있었다. 이 정권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의 안하무인과 후안무치에 가까운 현실인식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그것은 바로 탤런트 朴圭彩(박규채)씨의 영화진흥공사 사장 임명이었다. 임기의 5분의 4를 거의 채운 이제 와서까지 선거 때의 논공행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무리에 무리를 더해 가며. 이런 판이니 오늘의 난국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 용어가 언론에 등장할 때부터 불쾌감과 우려를 함께 느껴야 했던 것이 「가신(家臣)」과 「실세(實勢)」였다. 바로 그 가신과 실세들을 지금 국민은 부패와 부정에 대한 분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라의 형편을 아느냐▼ 나라 살림살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어쩌다가 92년에 4백28억달러이던 외채가 1천억달러를 넘어섰다. 이자만 해도 국민 한 사람이 한해에 1백97만원을 물어야 하는 돈이라고 한다. 친구들의 낭랑한 목소리와 화사한 웃음 속에 서서 내 딸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실내화며 참고서 같은 학교에 두고 다니던 소지품을 챙겨들고 3년을 보낸 교정을 걸어나왔다. 그 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네가 그토록 아름다웠던 다섯살 때. 아버지는 아직도 기억한다. 집안에 켜져 있는 전기 스위치를 끄고 다니던 너를 말이다. 화장실에 혹은 주방에 불이 켜져 있으면 너는 그때마다 그 불을 끄며 돌아다니곤 했었다. 우리 모두가 그런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릴없이 켜져 있는 집안의 불 하나부터 꺼나가야 한다고. 이것이 고통 속에서도 사랑해야 할 너의 조국이라고. 한수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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