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9년 전 北가족 찾아달라던 그 할아버지…

  • 입력 2009년 9월 1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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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 북측 이산가족 방문단이 머물고 있는 서울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호텔 앞에서 “우리 가족을 찾아 달라”며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였던 김상일 씨가 26일부터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열리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로 선정돼 소원을 풀게 됐다. 2000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 1면에 소개된 김 씨의 사진과 기사. 동아일보 자료 사진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 북측 이산가족 방문단이 머물고 있는 서울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호텔 앞에서 “우리 가족을 찾아 달라”며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였던 김상일 씨가 26일부터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열리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로 선정돼 소원을 풀게 됐다. 2000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 1면에 소개된 김 씨의 사진과 기사. 동아일보 자료 사진
당시 北상봉단 앞 피켓시위
올 방북 명단에 이름 올려


“가출 61년 만에 사죄 기회”

“가족들에게 인사도 못하고 도망 나왔는데 그게 마지막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돈 벌어서 효도하려고 했는데 쌀밥에 국 한 번 못 끓여 드리고….”

‘못난 아들’은 61년 만에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사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7일 대한적십자사가 발표한 이산가족 상봉자 100명 가운데 한 명인 김상일 씨(78)는 26일 금강산에서 동생 김선실 씨(68·여)와 김상철 씨(65)를 만난다. 1948년 7월 17일 평안남도 남포의 집을 나온 후 처음이다.

김 씨는 2000년 이뤄진 첫 남북이산가족 상봉 대상에 들지 못했다. 고혈압에 뇌중풍까지 맞아 건강이 좋지 못했던 김 씨는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상봉 장소인 서울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호텔 앞에서 찾는 가족의 이름을 쓴 종이판을 목에 걸고 북측 상봉단을 사흘 내내 쫓아다녔다. 혹시나 북측 가족을 아는 사람이 있거나 북한에 돌아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 매일 오전 7시에 나와 양발사다리 위에서 가족의 이름을 부르는 김 씨의 안타까운 모습은 동아일보 1면에 보도되기도 했다.

당시 17세 혈혈단신으로 인천에 내려온 김 씨는 큰돈을 벌어 금의환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1950년 3월 군에 입대하고 6월 25일 전쟁이 터지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됐다. 김 씨는 북한 동포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눠야 했다. “인민군 포로들이 잡혀올 때마다 혹시 내 동생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마음이 서늘했다”는 김 씨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죄스러운 마음은 그대로 한(恨)이 됐다.

15일 이산가족 상봉자 명단에 포함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김 씨는 전화를 받은 자리에서 만세를 불렀다. 가장 먼저 아내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고 이어 자식들과 지인들에게 전화와 e메일을 돌렸다. 김 씨는 “상봉 추첨에서 떨어질 때마다 가슴 아프고 난 정말 안 되는 건가 했는데, 연락을 받고도 믿기지 않아 직접 대한적십자사를 찾아갔다”고 말했다. 명단에서 ‘13번 김상일’을 확인한 그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김 씨는 “동생들을 보면 제일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17세의 씩씩한 소년처럼 들떠 있었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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