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홍혜경 이어 세계적 매니지먼트사 IMG와 전속계약 … 유럽 사로잡은 소프라노 서예리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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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눈의 ‘트렁크 여사’ 는 오늘도 짐을 싼다
그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파란 눈의 청중을 위해

바로크와 모던을 넘나들며 최정상 음악가들과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소프라노 서예리. 명료한 음색과 정확한 딕션, 학구적인 해석으로 고음악 및 현대음악 스페셜리스트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그는 “아카데믹한 고행을 즐긴다”고 말한다.
바로크와 모던을 넘나들며 최정상 음악가들과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소프라노 서예리. 명료한 음색과 정확한 딕션, 학구적인 해석으로 고음악 및 현대음악 스페셜리스트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그는 “아카데믹한 고행을 즐긴다”고 말한다.
2박 3일용, 5박 6일용, 그리고 한 달짜리. 거실에는 늘 크고 작은 트렁크 너덧 개가 펼쳐져 있다. 최근에만도 지난달 영국 에든버러에서 시작해 독일 프랑크푸르트, 하일브론을 거쳐 다시 베를린 집으로 돌아온 게 며칠 전이다. 이번엔 일주일쯤 머물다 곧 영국 런던으로 떠난다.

집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언제나 똑같다. 가방에서 빨래를 꺼내 세탁기에 던져둔 뒤 그 자리를 착착 갠 새 옷으로 채우는 일. 문득 손가락을 꼽아본다. 베를린 집에 머무는 날이 1년에 40일 남짓. 유럽을 누비는 일은 행복하면서도 외롭다.

베를린 하케셰 시장 역 근처에 있는 집 앞으로 트램이 땡땡 소리를 내며 지나다닌다. 가을비 내리는 밤, 오렌지색 우산을 든 소프라노 서예리(35)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트램을 바라본다. 이제 제법 익숙해진 이곳에서 지난날을 더듬어본다.

2000년, 예리는 베를린 국립음대 신입생이었다. 서울대 성악과를 마친 뒤 베를린행 비행기를 탔다. 베를린에 온 지 얼마 안 돼 학교 게시판에 베를린방송합창단 객원단원 오디션 공고가 붙었다. 모든 것이 낯선 유학생이었지만 용돈을 벌어볼 요량에 합창단을 찾아갔다.

노래를 막 마친 예리에게 단장이 말을 걸었다. “당신(Sie), 정단원 할 생각 없어요?” 잠시 숨을 멈췄다. 아직 독일어가 서툴러 잘못 들은 건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어… 저는 학생입니다.” 대충 얼버무리고 돌아왔다. 아는 언니에게 말했더니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했다. 다음 날 정단원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통지가 날아왔다.

합창단의 정단원이 됐다. 매일 오전 10시까지 합창단에 출근하고 저녁에는 공연을 했다. 나머지 시간에야 학교로 달려가 놓친 수업을 보충했다. 합창단 콘서트여행도 빠질 수 없었다. 엄연한 직장이니까. 베를린 공항에 내리면 곧바로 트렁크를 끌고 달려가 학교 수업을 들었다. 친구들은 예리를 ‘트렁크 여사’라 불렀다.

지난해 현대음악 작곡가 피에르 불레(위 사진 오른쪽) 탄생 85주년 기념 무대에서 서예리는 불레의 70분짜리 대작 ‘Pli selon pli’을 불러 호평을 받았다. 서예리 씨 제공
지난해 현대음악 작곡가 피에르 불레(위 사진 오른쪽) 탄생 85주년 기념 무대에서 서예리는 불레의 70분짜리 대작 ‘Pli selon pli’을 불러 호평을 받았다. 서예리 씨 제공
2002년 학교에서 ‘고(古)음악의 명장’ 르네 야콥스의 마스터클래스가 열렸다. 고음악이란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 등의 음악을 작곡 당시의 스타일을 살려 연주·노래하는 것을 말한다. 욕심 많은 트렁크 여사가 빠질 리 없었다. 예리는 공개 레슨에서 노래했다. 그날 야콥스가 말했다. “정말 ‘크리스털’ 같은 목소리를 가졌군. 오페라에 출연하는 건 어때.”

이듬해 인스부르크 고음악페스티벌 무대에 오르는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중 닌파 역으로 캐스팅됐다. 열렬한 갈채 속에 무대를 내려온 그에게 야콥스가 말했다. “정말 맑고 청아하군. 투명하게 흘러가는 목소리가 굉장해.” 그에게 ‘오페라 무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프라노가 아니라 여러 가지 색깔을 적재적소에 펼쳐 보이는 소프라노’라는 평이 쏟아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좋은 일이 계속 몰려들었다. 2003년 1월에는 독일의 젊은 작곡가 마티아스 핀처의 환상곡 ‘With lilies white(하얀 백합과 함께)’의 유럽 초연에서 켄트 나가노가 지휘하는 도이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현대음악 전문 소프라노로 데뷔한 것이다. 야콥스는 다른 무대를 또 제안했다.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의 협연, 오페라 주요 배역 오디션…. 미래가 꿈처럼 펼쳐지는 줄 알았다.

이제 달려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몸이 말썽을 일으켰다. 1년 사이에 전신마취로 탈장 수술을 네 번이나 했다. 데뷔를 했으면 빨리빨리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하는데. 회복될 만하면 다시 탈장. 손에 잡힐 것 같았던 큰 무대들은 모두 취소, 취소, 취소….

개복(開腹) 수술은 성악가에게 치명적이다. 몸을 완전히 가동시켜 노래해야 하는데 배가 땅기니 제 컨디션이 나올 리 없었다. 마음으로는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몸이 따라오지 않았다. 조급했다. 웅크리고 앉아 있다 보니 문득 생각이 났다. 대학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없었던 그날, 어린 마음에 힘들게 기다리는 법을 배웠던 때가. 예리는 생각했다. ‘나란 사람은 충분히 자만하고 교만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모든 게 한 번에 쉽게 오지 않나 보다. 다시 한 번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하나 보다….’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했던 그 어떤 때보다 기억에 선명한 순간이 있다. 2007년 독일 슈베칭겐 페스티벌 분장실. 안드레아 마르콘이 지휘하는 베니스바로크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이 막 끝난 참이었다. 분장을 지우며 긴장을 내려놓고 있는데 중년의 독일 아주머니가 들어오더니 예리를 붙들고 울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어찌할 바 몰랐다.

한참을 펑펑 울던 아주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겨우 얘기를 시작했다. “내가 암 수술을 받고 죽을 뻔한 사람이에요. 겨우 몸이 나아져서 콘서트를 보러 왔죠. 천사 같은 목소리를 듣고 바로 하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 있다 나타났어요. 죽어도 여한이 없네요. 천국 가는 길이 두렵지 않아요.”

예리는 커튼콜 때 받은 큰 꽃다발을 그 관객에게 건네고 꼭 안으면서 속삭였다. “몸이 건강해지시길 바랍니다. 정말 건강해지실 거예요.” 어쩌면 스스로 수천 번 다짐했을지 모르는 그 말을 하면서 그만 같이 울고 말았다. 노래하는 이유를 자신에게 되물어 봐야 하는 순간이 가끔 다가올 때, 예리는 늘 그때를 떠올린다.

솔리스트로 막 도약하려는 시기에 갑작스럽게 무너진 건강. 합창단원으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솔로 활동과 학업을 병행하는 일이 무리였던 것 같았다. 늘 혼자 트렁크를 끌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세 개의 일을 하다 보니 몸이 견딜 수 없었던가…. 그런 좌절의 시기, 르네 야콥스는 그를 다독였다. “예리, 스위스 바젤 스콜라 칸토룸 바실리엔시스에 가봐. 넌 늘 ‘앵무새처럼 노래하기는 싫다’고 했잖아. 공부하면 알고(知) 노래할 수 있어.”

당장 무대에 설 수 없지만 그 시간을 활용해 고음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했다. 2004년 그는 야콥스가 추천한 그 학교에 들어갔다. 고음악 전문학교에서의 교육은 이전과 달랐다. 성악곡을 배울 때도 모든 반주 악기가 등장하는 오케스트라 총보를 펼쳤다. 교수의 질문이 쏟아졌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에서 왜 플루트가 솔로 악기로 쓰였다고 생각하니?” “오보에가 왜 이 부분부터 나올까?” 악기마다의 언어가 있었다. 스타카토로 연주하는 것은 예수의 눈물이나 똑똑 떨어지는 핏방울이었다. 반음을 써서 절망과 탄식을 표현했다. 음표에 숨은 뜻을 짚어낼 수 있는 눈을 뜨게 됐다. 바젤에서의 1년이 흘러갔다. 서서히 배에 힘을 줄 수 있었다. 예리는 노래를 더 잘하기 위해 공부했다. 2006년 바젤 2년째가 돼서야 목소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갔다.

예리가 생각하는 고음악은 자유다. ‘재즈 같은 것’이다. 악보에 여지가 많기 때문에 해석의 재량을 한껏 발휘할 수 있어서다.

스케줄 표를 넘겨본다. 2013년까지 빽빽하다. 2014년 일정도 속속 들어오는 중이다. 지금 그는 세계적 매니지먼트사인 IMG 소속이다. 한국인 성악가로는 소프라노 홍혜경에 이어 두 번째.

2009년 11월 바젤오페라극장에서 독일 작곡가 볼프강 림의 오페라 ‘세 여인’의 세계 초연 때 IMG 런던의 매니저가 보러 왔다. “당신과 일을 같이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올해 결혼 12년 차. 남편이 3년 전 한국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면서 독일과 한국에 각각 떨어져 살고 있다. 음악 애호가인 남편은 음반에서나 접하던 대가들과 함께 무대에 서는 아내가 자랑스럽다. 늘 팬처럼 바라봐준다. 시부모도 노래하는 며느리를 위해 기도로 지원한다. 친정아버지는 한국에 들어오라고 하지만 고국행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예술가로 긴장하며 사는 삶, 낯선 호텔 생활과 식사…. 하지만 고음악부터 현대음악까지 다채로운 레퍼토리로 무대가 많은 유럽에서 노래하는 일이 모든 어려움을 잊게 해 줄 만큼 즐겁기 때문이다.

2011년 5월. 엄마와 런던 거리를 거닐던 예리는 서점에서 습관처럼 영국 음악전문잡지 ‘그라머폰’ 6월호를 집어 들었다. 책장을 차르르 넘겨 보다 순간 탄성이 튀어나왔다. ‘서예리, 르네 야콥스가 발견한 이 한국인 소프라노가 무서운 유망주로 급부상하고 있다.’

잡지 속에서 자기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 한국인 소프라노는 이전의 유명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들과는 다른, 어둡고도 깊은 감정의 표현까지 선보이고 있다.… 고음악뿐 아니라 피에르 불레, 마티아스 핀처 등 현대음악까지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넓혀가고 있다.’

CD 독집이 나오기로 했는데 동양인이라고 무산된 적도 있고, 오디션까지 통과했는데 연출자가 동양 여자라고 얼굴도 안 보고 거절해 출연을 못한 적도 있다. 좌절도 하고 울기도 했지만 그 때문에 더 오기가 생겼고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다.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던 그는 무엇이든 흉내 내기를 잘하던 아이였다. 초등학교 때는 아역 탤런트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부모를 졸랐다. 장래 희망에 피아니스트라고 또박또박 적어내던 소녀가 중학교 때 성악으로 진로를 바꿨다. 무조건, 이유 없이, 간절하게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지금도 그때와 똑같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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