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START]<1>‘나’ 아닌 ‘너’를 인정하자

  • 입력 2004년 12월 31일 17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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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과 동시에 나라가 두 동강 난 지 60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한 지 100년이 되는 2005년 대한민국은 역사의 한 분기점을 맞고 있다. ‘과거사법’과 ‘반민족행위법’이 그 푯말이 될 것이다. 이들 법이 우리 사회의 60년 묵은 갈등을 치유하고 100년 쌓인 앙금을 털어버릴 수 있을까.

그래서 앞으로 60년과 100년을 향한 새 출발(New Start)의 디딤돌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과거의 상처를 덧나게 해 또 하나 분란의 불씨만 만들까. 문제는 법이 아니라 의식이다. 2005년 대한민국의 ‘뉴 스타트’는 사회구성원 각자의 열린 마음이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분법의 폐쇄회로에 갇힌 사회

회사원 김모 씨(37)는 작년 말 대학동기 송년회에 괜히 참석했다고 후회한다. ‘친일 청산을 제대로 못해 역사가 바로잡히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측과 ‘친일 개념조차 명확하지 않은데 이제 와서 무슨 청산이냐’고 주장하는 측 사이에 고성이 오가다 서로 얼굴을 붉힌 채 술자리가 파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 편에 서지 않으면 도무지 이야기판에 끼어들 수 없었다”는 김 씨의 말은 황폐한 세태의 한 단면을 전해 주는 것이다.

개개인의 일상까지 파고든 이분법 또한 아픈 현대사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걸핏하면 ‘적과 동지’를 가르고 ‘우리와 저들’을 나누어, 쓸데없이 경계하고 질시하면서 헐뜯고 다투는 버릇이 한 세기에 걸친 식민지배와 분단 그리고 끔찍했던 동족상잔의 경험과 무관치 않다는 점에서다.

아직도 계속 중인 이라크 파병 논란도 사납다. 파병 찬성은 친미(親美), 반대는 반미(反美)로 거칠게 재단되는 상황에서 ‘용미론(用美論·미국을 이용하자는 것)’이나 ‘관미론(觀美論·미국을 바로보자는 것)’은 설 자리가 극히 비좁다. 권용립(權容立·정치학) 경성대 교수는 “외세와 타인에 대한 집요한 피해의식의 발로”라고 말한다.

○한국 정치판은 흑백논리의 볼모

많이 배우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도 별 차이가 없다. 아무것이든 TV 시사토론 하나만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면 금세 알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의 이분법 중독이 더 심한 경우도 있다. 상대방 주장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닐 텐데, 도대체 어느 한 대목 수긍하는 토론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모두 싸워서 이기려고만 하니 상대방 주장은 일단 무시하고 본다”는 방송토론진행자 정관용(鄭寬用·시사평론가) 씨의 진단이 적확하다.

저급한 ‘댓글문화’는 인터넷과 흑백논리의 결합이 낳은 신종 사회병리다. 자신과 의견이 다르면 마구 욕을 해대는 댓글문화의 확산이 토론문화를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있다. 김수환(金壽煥) 추기경까지 ‘망령든 노인네’로 몰리는 정도니 일반사람들의 경우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박길성(朴吉聲·사회학) 고려대 교수는 “인터넷이 흑백논리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비생산적인 한국 정치는 그러한 흑백논리의 볼모다. 세밑까지 싸움질로 영일이 없었던 지난해 정치권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아집과 비타협이었다. 대통령 탄핵 문제나 수도 이전 문제나 여야가 조금씩만 물러서면 파국을 면할 수 있었는데도 각각 완승을 노리다 서로 치명상만 주고받았다.

○패거리문화와 그 변종인 혈통주의

이분법에 찌든 사람들에겐 조화와 절충이 용납되지 않는다. 양보나 타협은 곧 변절이나 패배로 치부될 뿐이다. 중도나 중용 역시 용인되지 않는다. ‘회색분자’로 매도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런 행태가 ‘내 편’은 무조건 따르고 ‘네 편’은 무조건 내치는 패거리문화로 이어진다.

내편 네편 가릴 필요가 없는, 아니 가려서는 안 되는 3·1절 기념집회나 광복절 기념집회까지 보수와 진보진영이 따로 가질 정도로 우리 사회의 패거리문화는 중증(重症)이다. 그들의 분류법은 기계적이다. 싫어하는 신문에 기고를 하면 ‘나쁜 사람’이라는 식이다. 그들은 또한 낙인찍기를 좋아한다. ‘수구꼴통’이니 ‘빨갱이’니 하는 식으로.

학계의 혈통주의는 패거리문화의 변종이다. 미국과 유럽에선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접목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지만 한국 학자들은 양 분야를 넘나든 사실을 감추곤 한다. 교수 임용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종교계도 자유롭지 않다. 지난해 10월 개신교계의 두 축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추진한 연합예배가 끝내 무산됐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의견차 때문이었다.

○중간지대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

자문위원들은 실종된 중간지대를 복원해 온건한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게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양 극단에 치우쳐 있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계속 우리 사회를 주도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문위원들은 또 사회구성원 각자가 패거리가 아닌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지, 다양한 의견의 존재를 인정하는지 등을 점검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분법과 흑백논리를 극복하고 생산적인 토론문화를 형성하려면 누구나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할 줄 아는 ‘담론민주주의’가 요구되며, 과도한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는 언행을 줄이는 게 그 첫걸음이라는 얘기도 많았다. 강충모(姜忠模)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초중고교생들의 ‘인성함양교육’ 실시를 제안한 것도 같은 취지다. 상대방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고, 의견이 다른 사람과 공존하는 태도를 어릴 때부터 몸에 배게 하자는 것이다.

김호기(金晧起·사회학) 연세대 교수는 갈등해결시스템을 제안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관련 단체와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해 합의를 끌어내는 시스템을 확립하면 불필요한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고 유사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일관성을 유지할 수도 있다는 설명이었다. 인터넷 실명제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자문위원들의 의견도 많았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뉴 스타트’▼

▽국내정치 분야

강원택(숭실대 교수·정치학)

박세일(한나라당 의원·여의도연구소장)

박찬욱(서울대 교수·정치학)

유인태(열린우리당 의원)

조영식(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관리실장)

▽통일외교안보 분야

김성한(외교안보연구원 교수)

동용승(삼성경제연구소 북한연구팀장)

유호열(고려대 교수·정치학)

이대우(세종연구소 안보연구실 연구위원)

정재호(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경제 분야

김기원(방송통신대 교수·경제학)

김종석(홍익대 교수·경제학)

송병락(서울대 명예교수·경제학)

안종석(한국조세연구원 연구위원)

윤종훈(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회계사)

이두원(연세대 교수·경제학)

이만우(고려대 교수·경제학)

이언오(삼성경제연구소 전무)

정광선(중앙대 교수·경영학)

최흥식(한국금융연구원 원장)

▽노동 분야

김성중(서울지방노동위원장)

김유선(노동사회연구소장)

김원배(노사정위원회 상임위원)

김태현(민주노총 정책기획실장)

남성일(서강대 교수·경제학)

이기권(노동부 노사정책국장)

이병훈(중앙대 교수·사회학)

조준모(숭실대 교수·경제학)

최영기(노동연구원장)

최재황(경영자총협회 정책본부장)

▽시민운동 분야

권영준(경희대 교수·경영학·경실련 정책위원장)

김의영(경희대 교수·정치학·정치학회

NGO분과장)

김정훈(서울시민포럼 사무국장)

박진섭(환경운동연합 정책실장)

유석춘(연세대 교수·사회학)

이학영(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임현진(서울대 교수·사회학)

정현백(성균관대 교수·역사철학·한국여성단체연합회 공동대표)

조대엽(고려대 교수·사회학)

차병직(참여연대 집행위원장·변호사)

▽교육 분야

강태중(중앙대 교수·교육학)

김성일(고려대 교수·교육학)

남승희(명지전문대 교수·교육학)

박부권(동국대 교수·교육학)

박하식(한국외국어대부속 외국어고 교감)

서 광(보스턴 서운사 주지·스님)

송인수(좋은교사운동 상임총무)

윤종건(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이경자(인간교육실현을 위한 학부모연대 사무국장)

이순형(서울대 교수·아동학)

▽학술 문화 종교 분야

강우석(영화감독)

강은교(동아대 교수·시인)

강충모(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피아니스트)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

박길성(고려대 교수·사회학)

박지향(서울대 교수 ·서양사학)

심재찬(연극연출가협회장)

원 택(해인사 백련암 주지·스님)

이창영(천주교 주교회의 사무국장·신부)

정관용(방송인 겸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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