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지도’ 여론조사]“나는 중도” 46%

  • 입력 2004년 12월 31일 16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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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다.”

한국 사회 이념 갈등의 현주소를 알아보기 위해 본보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자신을 ‘중도성향’이라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이 예전에 비해 크게 늘었다. 또 자신을 보수성향이라고 밝힌 응답자가 진보 쪽의 답변을 하는가 하면 진보성향이라고 한 응답자가 보수 쪽 답변을 해 대체로 일관된 이념성향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이념성향보다는 지지정당이 사안별 의견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 대상자 가운데 무려 84.7%에 달하는 응답자는 우리 사회의 이념 분열상이 위험 수위에 이른 것으로 진단했다. 심각하지 않다는 응답은 10명 중 1명꼴에 불과했다.

국가보안법 개폐와 성장-분배 문제를 비롯해 진보냐, 보수냐 하는 이념 정체성을 가르는 의제들이 1년 내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함으로써 극단 대립이 끊이지 않은 데 대한 우려의 표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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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념성향을 진보도 보수도 아닌 ‘중도’라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이 최근 석 달 사이에 급격히 늘어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자신을 중도성향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46.2%로 진보(26.8%)나 보수(25.4%)보다 훨씬 많았다. 지난해 9월 본보-코리아리서치센터(KRC) 여론조사에서는 같은 물음에 대해 중도라는 응답이 32.2%로 진보(31.6%) 보수(28.4%)와 비슷한 분포였다. 한 마디로 이념을 기준으로 한 편가르기가 난무하는 사회 현상에 대다수 국민이 ‘질렸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특히 2003년 8월 이후 1년 넘도록 이념 분포에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으나, 지난해 정기국회가 시작된 시점(9월)부터 급격히 중도 성향이 늘어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야가 당의 이념적 정체성을 걸고 싸우는 국보법과 과거사진상규명법을 비롯한 4대 법안이 본격적인 쟁점으로 불거지고 시민단체까지 논쟁에 적극 개입하면서 사회 전반이 이념 대립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일반 국민들이 중도 성향으로 급격히 이동한 것이다.

KRC 김정혜 이사는 “경제는 어려운데 허구한 날 이념으로 싸우기만 하는 현실을 못마땅하게 여긴 다수 사람들이 특정 이념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현상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는 본보가 지난해 11월 초부터 기획 보도를 통해 주도하고 있는 ‘뉴 라이트 운동’의 지향점과도 맞닿아 있다. 뉴 라이트 운동은 이념의 중간지대를 넓혀 대화와 타협을 바탕으로 한 건전한 이념 경쟁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번 조사에서 국보법 개폐, 노사관계, 성장과 분배, 대북 지원 등 이념과 관련된 10가지 설문의 응답을 분석한 결과 진보와 보수의 양 극단을 각각 0과 10으로 했을 경우 이념지수 평균치는 5.4(중도 보수)로 나타났다. 응답의 평균 이념지수가 중간 지대인 4∼6점대에 속한 설문 항목은 10개 중 7개였다. 공무원 및 교사의 파업 문제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평가에서는 7점대의 보수적 경향이, 환경 문제에서는 2점대의 진보적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는 한국사회와 그 구성원을 이념 잣대로 분류하는 게 얼마나 허상에 가까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을 진보, 보수, 중도 성향이라고 대답하면서도 구체적인 사회 이슈에서는 전혀 다른 답변을 한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용주의를 비롯한 탈(脫)이념화 현상 또는 이념의 혼재 현상으로 해석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박정희는 긍정, 환경은 진보적 응답 압도적▼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조사 대상자의 주관적 이념성향이나 지지하는 정당은 물론 성, 연령, 지역, 직업, 학력, 출신지와도 별 상관없이 ‘긍정’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는 이번 조사에서 대부분의 항목들이 갈라진 이념 성향을 보여준 것과는 대조적이다.

조사 대상자 중 자신의 이념성향을 ‘진보’라고 밝힌 사람의 65.8%가 박 전 대통령에 대해 ‘경제발전 등 긍정적 업적이 더 많다’고 답했다. 반면 ‘독재 등 부정적 측면이 더 많다’고 응답한 사람은 24.8%에 불과했다. 또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지지자 중 각각 63.1%, 58.7%가 박 전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는 경제사정이 갈수록 악화되는 현실 속에서 박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경제적 실용주의’와 고성장 시대에 대한 향수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됐다.

한편 환경문제, 공무원과 교사의 노조활동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70% 이상이 보수 또는 진보의 한쪽 편향으로 응답하는 ‘쏠림 현상’을 보여 눈길을 끌었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현안 판단기준 ‘이념보다 정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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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조사에서는 자신의 이념성향보다 지지하는 정파의 주장이 개인의 의견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같은 경향은 10개의 설문 가운데 ‘대북 경제지원에 대한 찬성(진보)과 반대(보수)’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찬반’ ‘노동자 권익 보호 대 기업 경쟁력의 우선순위’ ‘복지에 대한 국가 대 개인의 책임 비중’ ‘한미동맹 대 독자외교 우선순위’ 등 5개의 설문에 대한 응답자 분석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이들 5개 설문 전부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은 높은 비율로 각각 진보적, 보수적, 진보적 응답을 했다.

반면 응답자를 직업, 학력별로 구분해 답변을 분석한 데서는 일정한 경향이 발견되지 않았다.

또 조사 대상자 중 자신의 이념성향을 ‘보수’라고 답한 사람 중 66.3%가 국보법 폐지에 반대했으나, 한나라당 지지자 중 국보법 폐지에 반대한 비율은 이보다 10%포인트가량 높은 76.5%나 됐다. 또 이념성향을 ‘진보’라고 답한 사람 중 49.9%가 ‘한미동맹보다 독자외교가 필요하다’고 답했으나, 민주노동당 지지자 중 같은 답을 한 비율은 58.3%에 달했다.

자신의 이념성향을 ‘중도’라고 답한 사람들도 지지정당에 따라 의견이 크게 갈렸다. 스스로 중도성향이라고 답한 사람 가운데 열린우리당 지지자는 60.5%가 대북 경제지원에 찬성했으나 한나라당 지지자 가운데는 36.4%만 찬성했다. 또 중도성향 가운데 한나라당 지지자의 71.6%가 국보법 폐지에 반대했으나 열린우리당 지지자의 반대는 28.8%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우리 사회 전반의 원칙 없는 ‘당동벌이(黨同伐異·같은 무리와 똘똘 뭉쳐 다른 자는 공격한다)’의 근원이 ‘이념보다는 정파’에 쏠리는 데 있다는 지적이 한층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어떻게 조사했나▼

본보는 이번 조사에서 기존 자료들을 참고하고 전문가의 조언을 구해 현재 우리 사회의 이념 갈등현상을 짚어볼 수 있을만한 항목들을 나름대로 선별했다. 총 10개 항목을 선정해 항목별로 진보 보수 성향의 양쪽 입장을 제시하고, 중간을 포함해 5단계로 응답하도록 했다. 코리아리서치센터(KRC)가 지난해 12월 23, 24일 지역별 성별 연령별로 할당 추출된 1502명의 전국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전화 조사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5%포인트. 구체적인 설문항목은 동아닷컴(설문항목 바로가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선미 전문위원 sunny6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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