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07년 영친왕 ‘볼모’로 日도착

  • 입력 2008년 12월 15일 03시 01분


1907년 12월 15일 일본 도쿄(東京)의 신바시(新橋)역. 대한제국(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1897∼1970)과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행이 플랫폼에 모습을 나타냈다. 일본의 주요 인사와 귀부인 등 1000여 명이 역에 나와 이들을 맞았다.

불과 열 살의 어린 영친왕이 고종황제와 엄황귀비 품을 떠나 인천항을 출발한 지 열흘 만이었다. 영친왕은 역을 나와 숙소인 시바(芝)별궁으로 향했고 영친왕의 일본 유학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위당한 1907년. 고종의 맏아들 순종이 황제로 즉위했고 이와 함께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 영친왕은 황태자로 책봉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영친왕을 일본으로 유학 보낼 것을 건의했다. 말은 유학이었지만 실은 볼모였다.

황실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어린 황태자를 어떻게 홀로 이국땅에 보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압력을 견딜 수 없었던 고종은 영친왕이 방학 때마다 조선에 오도록 하는 조건으로 유학을 받아들였다.

영친왕의 일본에서의 하루하루는 몰락한 왕조의 후예가 얼마나 힘겨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자 일제는 영친왕을 황태자에서 왕세자로 강등시켰다. 또 약속과 달리 1911년까지 영친왕을 조선에 보내지 않았다.

1920년엔 일본의 강요에 의해 일본 왕실 출신인 나시모토 마사코(梨本方子·한국명 이방자·1901∼1989)와 정략결혼을 해야만 했다. 영친왕은 황태자가 되기 전 동갑내기 소녀와 약혼을 한 상태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강제로 파기했다.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육군 중장에 올랐지만 그의 삶은 불안하고 힘겨웠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영친왕 부부는 일본에 재산을 몰수당했다.

영친왕은 광복된 조국에 돌아오고 싶어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귀국을 거부했다. 1963년 박정희 정부에 의해 입국이 허락됐다. 부인과 함께 꿈에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지만 그는 이미 쓰러져 기억상실증과 실어증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영친왕은 창덕궁 낙선재에서 오랜 투병생활 끝에 1970년 한 많은 생을 마치고 고종과 순종이 묻혀 있는 경기 남양주시 홍유릉(洪裕陵) 옆에 안장됐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고 그 경계선에서 늘 흔들리며 살았던 부인 이방자 여사의 삶도 비극적이었다. 한국 땅에서 봉사에 앞장섰던 그는 1989년 고단했던 삶을 마감하고 영친왕 묘에 합장됐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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