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위기의 의문사 규명위 어디로 가나

  • 입력 2002년 1월 16일 18시 20분


과거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발생한 의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2000년10월 출범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활동 시한 3개월여를 남기고 위기를 맞고 있다.

양승규(梁承圭) 위원장 등 상임단 3명은 15일 ‘위원회 활동의 실질적 마비를 가져온 데 대해 책임을 지고’ 대통령에게 사표를 냈고 14일 실무 과장과 팀장 등 10여명도 사직서를 위원장에게 제출했다.

위원장 등의 사퇴는 지난해 12월 일부 의문사 유가족들에 의한 위원장실 점거 농성의 결과로 볼 수 있지만 실무진의 사직서 제출은 예상치 못한 일. 조사 활동은 계속되고 있지만 위원회의 실질적인 운영에 적지 않은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갈등의 전개〓위원회는 지난해 12월까지 모두 83건의 진정 중 15건을 종결 처리했다. 이 중 2건이 의문사로 인용(認容)됐고 12건은 기각, 1건은 각하됐다.

기각 사건이 예상외로 많자 일부 유가족들은 위원회의 조사 과정과 기간, 방식 등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고 조사 내용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녹화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군에 강제 징집돼 의문사한 학생들의 가족은 피조사기관인 기무사의 협조 거부에 분개하며 강제수사권과 비밀취급인가 부여 등 위원회의 조사 권한을 확대하는 법 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위원회측은 “기각 사건들은 모두 민간조사관과 정부에서 파견된 조사관들이 같이 조사했고 위원회의 만장일치로 처리돼 어떤 이견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또 법 개정 문제도 “위원회가 초법적 기구가 아닌 이상 수사권은 검사에게만 있도록 돼 있는 헌법을 뒤집을 수는 없다”며 거부했다.

이에 반발해 특수조사과장 등 민간인 전문위원 4명이 사퇴하고 이어 일부 유가족들이 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위원장실을 점거해 농성을 벌이는 사태로까지 이어졌다.

▽갈등의 원인〓위원회의 성격에 대한 위원회측과 유가족측간의 견해차가 주원인으로 알려졌다.

위원회측은 의문사위원회가 비록 유가족의 노력 끝에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유가족으로부터 독립적인 기구여야 한다고 보고 있는 반면 유가족측은 자신들은 단순한 진정인이 아니라 의문사를 함께 풀 동반자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한 상임위원은 “위원회의 조사 내용과 과정을 유가족들에게 납득시키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던 것이 실수”라며 “그러나 엄밀히 말해 유가족들은 국외자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10월 사퇴한 한 민간 조사관은 “유가족들과 위원회 사이에 원활한 의사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가족들은 위원회가 유가족을 소외시킨다고 판단했고 위원회는 조사 활동이 일부 유가족들에 의해 휘둘린다는 생각을 갖게 됨으로써 갈등이 빚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전망〓위원회는 그동안 73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숨진 서울대 법대 최종길(崔鍾吉) 교수와 89년 전남 거문도에서 ‘실족사’했다는 이내창(李來昌)씨 의문사에 대한 진실 규명에 한 발 다가섰다. 또 장준하(張俊河) 선생 사망 사건도 일부 진전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사시한 안에 남은 68건의 진정을 모두 처리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현재 조사기간 연장을 주 내용으로 하는 법 개정안이 준비중이어서 법안이 통과되면 조사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시급한 과제는 공석이 된 위원장의 임명 등 상임단 재구성 문제. 대통령이 새로 위원장을 임명을 하거나 비상임위원 6명 중에서 뽑아야 한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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