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한국화이자 '탄저균 배달' 소동 전말과 문제점

  • 입력 2001년 10월 28일 18시 45분



약 하루 동안 국내에 ‘미국발 탄저균 공포’를 몰고 왔던 한국화이자제약 택배물에서 나온 ‘백색가루’는 탄저균이 아닌 것으로 공식 판명됐다. 국립보건원은 27일 “한국화이자제약의 국제 택배물에서 발견된 백색가루를 18시간 동안 배양한 결과 어떤 균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보건원은 “택배물의 발신자가 이 회사의 주거래은행인 미국 뉴욕 씨티은행으로 분명하고 내용물도 1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보안번호 교체를 알리는 안내서류였다”고 밝혔다. 직원들을 검사한 서울중앙병원측도 “직원들의 가검물을 분석한 결과 특이점이 없고 별다른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소동의 전말〓‘탄저 공포’가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만 하루 동안은 숨가쁘고 긴박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26일 오전 9시반경 한국화이자제약의 여직원 김모씨(45)는 사무실로 배달된 한통의 국제 택배물을 개봉했다. 순간 서류봉투에서 미량의 백색가루가 떨어지자 탄저균일 수 있다며 다른 직원들에게 알리고 경찰에 신고했다.

회사측은 서류봉투가 배달된 사무실에 있던 직원 16명을 모두 병원으로 이송한 뒤 사무실을 폐쇄하고 직원들을 퇴근시켰다.

현장에 출동한 소방본부 방재센터 요원들은 수거한 봉투를 국립보건원 생물테러 대책반에 넘겼다. 이날 밤 늦게 한국화이자측은 뉴욕 씨티은행과의 전화통화로 서류봉투를 택배로 보낸 사실을 확인했다.

병원으로 옮겨진 직원들은 항생제 투여 등 응급조치를 받은 뒤 격리 수용된 채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문제점〓이번 소동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웃어 넘기기 어려운 문제점들을 드러냈다.

먼저 상황을 걷잡을 수 없이 확대시킨 ‘주범’은 미국의 탄저균사태 이후 형성된 막연한 공포감과 그로 인한 과민반응. 한국화이자제약에 배달된 물건은 △국제 우편물이 아니라 택배물이었고 △발신자가 명확하고 평소 같은 종류의 서류를 보내왔으며 △수신자가 테러 대상으로 지목될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택배물 자체에 특이한 점이 없었던 만큼 사실상 탄저균이 들어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일부 직원들의 과민반응이 이런 정황들을 침착하게 따져볼 여유도 없이 비상상황으로 몰아간 것이다.

불안해하는 국민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대처 요령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야 할 정부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노이로제’의 확산〓이번 소동은 ‘백색가루 노이로제’의 현주소를 보여준 단적인 사례. 실제로 그동안 경찰청과 소방본부 등에 접수된 백색가루 신고는 모두 1000여건이나 된다. 경찰과 119구급대가 출동한 건수만도 370여건. 특히 소동이 벌어진 26일 하루에만도 16건의 신고가 접수됐지만 모두 밀가루와 설탕, 커피크림 가루로 확인됐다.

▽전문가 조언〓전문가들은 국내의 경우 일부 대형병원과 연구소에서 완벽한 보안 조치가 취해진 상태에서 탄저균이 보관돼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 들어오는 출처가 불분명한 우편물을 제외한 국내우편물은 크게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국립보건원 관계자는 “이번에도 해당 제약회사에서 문제가 된 택배물이 주기적으로 발송됐다는 것만 밝혔어도 이렇게 큰 소동이 벌어지진 않았을 것”이라며 “일반 시민들도 막연한 공포감 때문에 과민하게 반응하지 말고 침착하게 판단하고 대응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흰색가루라고 모두 탄저균 포자는 아닌 만큼 너무 과민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 특히 확실히 눈에 보일 정도로 많은 양의 흰색가루는 십중팔구 탄저균 포자가 아니라는 것.

서울시 소방방재본부 소방학교 이승환 교수(응급의학과)는 “탄저균 포자 1개의 크기는 1∼5㎛로 눈으로 식별할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적어도 1000개의 포자가 모아져야 한다”며 “밀가루에 미량의 탄저균 포자를 섞을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탄저균으로 의심할 수 있는 흰색가루를 발견했다면 수취인이 테러 대상이 될만한 사람인지, 그리고 발신지를 확인하고 그래도 의심이 가면 경찰이나 국립보건원에 신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윤상호·민동용기자>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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