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농민 첫 개인파산 선고

  • 입력 2001년 6월 12일 18시 46분


“열심히 일했는데도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농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자연재해 등으로 지게 된 빚을 견디다 못한 한 농민이 결국 법원에서 개인파산 선고를 받았다.

▽사례〓강원 철원군에서 축산업에 종사해온 박모씨(44)는 15년 전 지뢰폭발 사고로 두 눈을 잃었다. 맹인인 박씨는 1급 장애에도 불구하고 축협에서 280만원을 대출받아 소 3마리를 키우며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한 마리는 송아지를 낳다가 죽었고 또 한 마리는 질병으로 폐사했다. 게다가 폭설 때문에 축사까지 무너졌고 남은 한 마리와 송아지를 키웠지만 소값이 폭락해 사료값조차 건지지 못했다.

박씨는 이후 다시 대출을 받아 염소 60마리를 사들였다. 그러나 계속된 들개들의 공격으로 이 중 50여마리나 잃었다. 개 사육 등도 해봤지만 역시 가격이 폭락해 모두 헐값에 팔아 넘겨야 했다.

아내마저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지난해 집을 나갔고 16세, 14세된 두 아들과 함께 생계를 꾸려왔다. 그러나 빚은 금세 8000여만원으로 늘었고 유일한 재산인 집마저 경매로 처분됐다. 그래도 부채는 절반 이상이 고스란히 남았다.

박씨는 두 아들을 미국으로 입양시켜야 할 처지에 놓이자 결국 올해 초 서울지법 파산부에 개인파산 신청을 냈다. 두 아들은 탄원서를 통해 “앞도 못 보는 아버지가 홀로 꽃동네에 들어가시게 됐다”며 “선처해 주시면 열심히 돈을 벌어 나중에 어려운 이웃도 돕고 아버지 의안도 해드리고 싶다”고 호소했다.

서울지법 파산3부(이형하·李亨夏부장판사)는 최근 이를 받아들여 박씨에게 개인파산을 선고하고 면책신청을 낼 수 있도록 했다.

▽개인파산 실태와 원인〓서울지법 파산부에 개인파산을 신청한 사람은 올들어 1월 13명, 2월 18명, 3월 35명 등으로 지난해에 비해 2배 이상 계속 늘고 있다.

그러나 박씨처럼 농업 축산업 등에 종사하는 사람이 서울지법에 파산신청을 내 받아들여진 경우는 최근 몇 년 동안 박씨가 유일하다.

개인사업자는 물론 신용카드 빚을 갚지 못한 일반 소비자들이 내는 개인파산 신청은 급증하는 데 비해 부채에 허덕이는 영세 농민들의 신청은 거의 없어 대조적이다.

파산부 관계자는 “농민들은 대부분 농업을 천직으로 알고 조그만 땅이라도 평생 재산으로 잡아두려는 경향이 크다”며 “파산절차에 들어가게 되면 소유재산인 땅이나 축사 등도 모두 처분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기피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재산보다 부채가 훨씬 많더라도 생업을 계속하기 위한 기본적인 ‘터’는 놓치지 않으려 한다는 것.

또 다른 파산부 관계자는 “많은 농민들이 농가부채에 시달리면서도 개인파산 제도를 몰라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개인파산을 신청하려 해도 동네 친인척들간에 복잡하게 얽힌 연대보증 문제 때문에 혼자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개인파산 제도〓개인(소비자) 파산은 빚이 재산보다 많아 이를 해결하기 어려운 개인이 법원의 파산 절차에 따라 재산을 처분하는 제도.

그 후 면책신청을 내고 법원의 심사와 채권자의 동의를 거쳐 면책결정을 받게 되면 남은 빚을 모두 탕감받게 된다.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은 금융기관의 내규에 따라 대출을 받지 못하게 되는 등 불이익을 받게 되지만 법원에 복권신청을 하면 권리를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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