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고교장 추천제' 겉돈다

  • 입력 2000년 10월 4일 18시 39분


주부 이모씨(49)는 서울대와 연세대 수시모집에 응시한 서울 D고교 3년생 아들의 원서를 작성하느라 며칠을 바쁘게 보내야했다.

“학교에서 아들에게 고교장추천서 초안을 쓸 것을 요구해 고민하다 대학원에 다니는 조카와 딸의 남자 친구 도움을 받았습니다. 자기소개서를 쓰기도 힘든데 수험생이 고교장추천서까지 쓰면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언제 준비하나요?”

‘수험생이 교장이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고교에서 대학에 제출하는 고교장추천서를 학생이 작성하고 있는 것. 이 때문에 수치화된 성적이 아닌 객관적인 관찰자의 평가를 통해 수험생의 면모를 알아보려는 학교장 추천제의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다.

앞으로 있게 될 정시모집에서도 고교장추천서를 받는 대학이 있어 이 같은 일은 되풀이될 전망이다.

▽고교장추천서 작성 실태〓서울 K고는 올 수시모집에 수십명이 응시했으나 이 학교 P교장은 어느 학교에 누구를 어떤 이유로 추천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의 이름만 빌려줬을 뿐 학생들이 쓴 추천서를 담임들이 대충 보고 대학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P교장은 “한 학생이 여러 대학 원서를 가져와 추천서를 요구하기 때문에 성의 있는 추천서를 쓰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털어놓았다.

서울의 또 다른 K고 C교장은 “대부분 추천서를 ‘성실하고 리더십이 있으며 공부를 잘 한다’는 식으로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고교는 한 학생이 여러 대학에 원서를 내고 입시용 서류가 많아 대학마다 형식이 다른 추천서를 일일이 쓸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학부모와 수험생의 혼란〓서울 S고 3년생 김모군(18)은 고교장추천서를 쓰기 힘들어 부모에게 부탁했다. 김군의 부모는 글에 자신이 없어 평소 알고 지내던 H씨에게 부탁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H씨도 남의 자식의 앞길에 관련된 일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결국 자신이 고교장추천서를 쓴 김군은 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학부모들은 돈을 주더라도 추천서 자기소개서를 대필할 사람을 찾는 등 ‘몸살’을 치른다.

▽대학의 평가〓지난달 28일 열린 서울대의 ‘면접방안 설명회’에 참석한 교수들은 마구잡이로 작성된 고교장추천서가 학생의 우열을 가리는 변별력을 잃었다고 입을 모았다.

고려대 김성인(金成寅)입학관리실장은 “교수들이 고교장추천서를 믿기 어려우니 전형에 반영하는 추천서의 비중을 낮출 것을 요구해 난감했다”고 말했다.

▽개선방안〓대학마다 추천서의 양식이 천차만별이어서 고교에서 수험생이 지원하는 대학에 맞춰 모든 추천서를 새로 써야 하고 대학이 추천서에 반드시 들어갈 사항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아 대다수 고교가 추천서에 무엇을 써야할지 모르고 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이현청(李鉉淸)사무총장은 “추천서의 양식을 통일하면 수험생과 학부모의 혼란이 상당 부분 줄어들 수 있다”면서 “각 대학이 기본 사항을 공통적으로 요구하고 대학이 특성에 따라 한두 가지 사항을 추가로 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서울대는 허위 추천서를 제재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서울대 유영제(劉永濟)교무부처장은 “2002학년도부터 부실한 추천서를 쓴 추천인에게 추천권한을 박탈하는 등 불이익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준우·이진영기자>ha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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