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의 글로벌 인사이더]트럼프 시대, 총의 공포 속에서 살아가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30일 15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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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 기자
정미경 기자
미국 워싱턴 특파원 시절 “가장 많이 쓴 기사가 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한미관계도 아니고 미국 대통령에 관한 것도 아니다. 다름 아닌 ‘총기 사건’에 관한 것이다. 콜로라도, 코네티컷, 워싱턴 등 미국 곳곳에서 끊임없이 터지는 총기난사 사건에 관한 기사를 쓰느라 많은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냈다. 총기 기사는 쓰기도 쉽지 않다. 미국에서 유통되는 총기가 워낙 다양한지라 총기 관련 책을 뒤져봐도 아리송한 경우가 많아서다.

미국에서 총을 가진 사람은 많다. 시골에서는 사냥용, 도시는 호신용, 갱들은 살상용으로 장식장, 서랍 속이나 베개 밑에 총을 두고 산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총기를 가진 미국인이 48% 정도로 2명 중 1명은 총을 가진 셈이다. 2015년 통계 자료를 보면 하루 29명이 다른 사람이 쏜 총에 사망했다. 총기로 자살하는 사람은 하루 55명을 넘는다. 하루 평균 80~90명이 총 때문에 목숨을 잃는 셈이다.

미국의 유명 하드보일드 작가 짐 톰슨이 말했듯 미국은 총에 미친 ‘건 크레이지(Gun Crazy)’ 문화 속에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사람들이 미칠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총이고, 다른 하나는 차(車)라는 농담도 있다. 자동차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경우가 적지만 총은 타인 살상의 경우가 많아지고 있으니 규제는 당연하다는 의견이 최근 미국 사회에서 주류를 형성한다.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하면 미국 사회의 움직임은 대체로 비슷하게 흐른다. 대통령은 사건 현장을 방문해 무고한 희생자를 추도한다. 정치권에서는 총기 규제 법안이 신속하게 만들어진다. 언론도 미국의 총기 문화에 대한 다양한 기사를 쏟아낸다.

그러나 총기 규제 법안이 통과되는 경우는 없다. 사실 법안 자체도 큰 임팩트가 없는 누더기 법안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규제 대상이 되는 총기의 종류를 줄이고, 총기 구매를 위한 대기 시간을 단축시키려는 보수파 의원들의 의견이 대부분 관철된다. 의원들은 총기 규제 문제에 손을 담그기를 꺼린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공화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은 강력한 총기 규제론자였지만 대선 기간 동안에는 총기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을 꺼렸을 정도다.

개인의 재산과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총기 소지는 정당화돼야 한다는 미국의 보수적 민심과 전미총기협회(NRA)의 막강한 로비 파워를 꺾고 총기 규제를 관철시킬 정치인은 미국에 별로 없는 듯 하다. 미국 공화당 행사를 취재할 당시 다른 로비 단체들은 조그만 부스 하나를 차려놓고 있는데 NRA는 1개 층 전체에 부스를 차리고 장난감 총을 나눠주며 홍보 활동을 하는 것을 보고 NRA의 파워를 절감했다.

미국 사회에서 총기 규제가 왜 그리 어려운지는 미국의 헌법 정신과 독립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총기 옹호론자들이 과거 서부 개척시대 때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총기 소지권을 높은 범죄율과 총으로 인한 살상이 다반사인 현대 사회에서 그대로 유지하려고 고집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본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은 총기 규제와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가 최대 관심을 기울인 2개 정책은 불법 이민자의 무분별한 추방 방지와 총기 규제였다. 오바마 대통령이 강력한 추진력으로 밀어붙여 성사시켰던 불법 이민 추방 유예 행정명령은 트럼프 시대가 열리자마자 폐지됐다. 트럼프는 대선 후보 시절부터 총기 소지 권리를 수차례 얘기했으니 총기 규제 완화 법안이 미 의회에 상정될 날도 멀지 않았다.

필자가 정치 행사 취재를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의 흑인 밀집 지역 호텔에 묵었을 때였다. 밖에서 총 소리가 나서 혼비백산한 적이 있었다. 총 소리의 공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멀리서 나는 총 소리였지만 빨리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앞으로 미국에서 총기 규제가 느슨해지면 이곳 저곳에서 총소리가 들릴 날이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무고한 시민들이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매뉴얼이라도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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