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진단]‘유커 러시’ 대처법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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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소비자경제부 차장
김상훈 소비자경제부 차장
15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과학과 문화 수준은 유럽을 능가했다. 종이,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 인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발명품은 모두 중국에서 나왔다. 그랬던 중국이 유럽 국가들에 밀리기 시작했다. 바다를 놓친 것이 큰 패인(敗因)이었다.

포르투갈 함대는 인도로 가는 뱃길을 개척했고, 스페인 함대는 지구를 일주했다. 마젤란은 항해 도중 발견한 아시아 섬나라를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 필리핀이라 명명했다. 바다를 장악한 스페인은 가장 먼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다.

얼마 후 영국이 스페인을 꺾고 바다를 장악했다.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영국 개척자들은 정착촌을 ‘처녀의 땅’이란 뜻의 버지니아라 불렀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기리기 위해서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만들고 아시아와 아메리카 경영을 시작했다. 신대륙에서 획득한 자원은 산업혁명의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이처럼 유럽이 세계로 뻗어나갈 때 중국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돼 버렸다. 사실 중국은 포르투갈이 신항로를 개척하기 수십 년 전에 동남아시아, 인도, 서아시아를 지나 아프리카까지 항해했다. 정화(鄭和)가 진두지휘한 이 프로젝트가 남해원정이다. 오늘날 동남아시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화교는 이 남해원정 와중에 탄생했다.

시기만 앞선 게 아니다. 규모도 유럽을 압도했다. 유럽 함대는 기껏해야 4, 5척에 불과했지만 정화 함대는 60척이 넘었다. 유럽 함대의 기함 길이는 30m도 되지 않았지만 정화가 탄 함선은 120m에 이르렀다. 선원만 2만 명이 넘었다. 이랬으니 만약 중국이 아프리카를 넘어 유럽까지 항해했다면 그 후의 세계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의 유학자들은 바다보다 땅을 중요하게 여겼다. 결국 남해원정은 중단됐다. 중국은 세계를 호령할 기회를 걷어찼다.

500년도 더 된 15세기의 역사다. 아득한 옛날이야기로만 여겼는데, 요즘 전 세계 각지를 누비는 중국인 관광객(遊客·유커)을 보면서 이 남해원정이 자꾸 떠오른다. 무슨 일을 벌여도 덩치 하나만큼은 최대를 지향하는 중국의 ‘전통’ 때문일까. 수천 명이 동시에 움직이고, 한번 쇼핑하면 싹쓸이를 해 버리는 모양새에서 남해원정의 기세가 느껴진다. 달라진 점이라면, 정화 함대가 환영받지 못했던 과거와 달리 요즘엔 모든 나라가 유커를 유치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것이다.

3월 28일 인천 중구 월미도 문화의 거리에서 중국인 관광객 4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치맥 파티 현장. 이번 중국인 단체관광은 역대 최대 규모로 기록됐다. 동아일보DB
3월 28일 인천 중구 월미도 문화의 거리에서 중국인 관광객 4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치맥 파티 현장. 이번 중국인 단체관광은 역대 최대 규모로 기록됐다. 동아일보DB
지난달 27일부터 6박 7일 일정으로 중국의 건강보조식품 유통 기업 아오란그룹의 직원 6000명이 국내 여행을 즐겼다. 여행 일정 중 인천 월미도 문화의 거리에서 열린 치맥파티는 핫이슈가 됐다. 치킨 3000마리가 공수됐고 캔맥주 4500개가 순식간에 동이 났다. 이들은 158편의 항공기에 나눠 탑승해 한국에 왔고, 관광버스 140대를 타고 여행을 다녔으며, 26개 호텔 1500개 객실에 머물렀다. 이번 유커들의 방한으로 인천시가 얻은 경제효과가 당초 예상치인 120억 원을 넘어 200억 원에 이른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유커들의 단체여행이 화제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5월에는 프랑스 니스에서 중국 톈스그룹 직원 6500명이 여행을 즐겼다. 당시 니스에서 그들이 쓴 돈은 2000만 유로, 우리 돈으로 245억 원에 이른다. 유커가 세계 관광시장의 지형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2011년 한국을 찾은 유커는 전체 외국인 관광객의 22%인 222만 명이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에는 외국인 관광객 1323만 명 중 45%인 598만 명으로 늘었다. 이러니 국내 관광산업의 성패를 유커가 좌우한다거나 관광 인프라를 늘려야 한다는 말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마침 문화체육관광부가 관광 정책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관광정책실을 신설키로 했다. 환영할 만한 변화다. 다만 컨트롤타워의 유무를 떠나 관광 당국이 현장을 얼마나 살피고 있는지 묻고 싶다.

저가 저질 관광과 무자격 가이드가 문제이니 단속하겠다는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정부는 영세 업체가 난립할 수밖에 없는 산업 생태계의 개선책을 모색해야 한다. 유커들이 좋은 관광지를 마다하고 제주도와 서울·수도권, 한류 드라마 촬영장만 가는 이유부터 찾아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와 민간의 협력을 말로만 외칠 게 아니라 협력이 되지 않는 부분부터 찾아내야 한다. 이런 노력이 ‘유커 러시’에 대처하는 자세다.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고? 맞다. 그 당연한 기본을 지키지 않으니 해법도 희미해지는 것이다.

김상훈 소비자경제부 차장 corekim@donga.com
#데스크 진단#김상훈#유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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