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진단]감탄고토 정부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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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동 경제부 차장
유재동 경제부 차장
우리 국민은 숫자에 민감하다. 외부로부터의 평가에도 관심이 많다. 그렇다 보니 외국 기관이 “한국이 몇 등을 차지했다”는 발표만 내놨다 하면 매번 ‘짭짤한’ 뉴스거리가 된다. 이런 뉴스는 소셜미디어에서도 휘발성이 높아서 관료사회나 정치권에서 즉각 ‘반응’이 온다.

문제는 그런 반응들의 상당수가 그다지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평가 결과가 좋으면 “우리가 이런저런 정책을 편 덕분”이라는 공치사가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인과관계가 좀 의심스러워도 비슷해 보이는 건 일단 숟가락을 얹고 본다. 반대로 나쁜 지표가 나오면 조용히 숨죽이고 있거나 남에게 책임을 돌린다. 또는 “조사 자체가 엉터리”라며 아예 평가기관을 깎아내리는 일도 불사한다.

정부 부처를 오랫동안 취재해온 기자는 이런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10년 이상 지켜봤다. 그중 몇 가지만 소개한다. 가장 기억이 멀리 닿는 2007년 가을 일이다. 스위스의 비영리단체 세계경제포럼(WEF)이 한국의 국가경쟁력을 전년보다 12단계 오른 11위로 평가했다. 당시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는 “혁신을 위한 노력이 인정을 받았다”, “이제 국가 경제 구조가 선진국 단계로 완전히 진입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기자들에게 “잘(크게) 써 달라”는 공무원들의 당부 전화도 여기저기에서 쇄도했다.

안타깝게도 정부는 한 해 전인 2006년 WEF 발표에는 180도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해 WEF가 한국의 순위를 5계단 떨어뜨린 게 원인이었다. 당시 정부는 “평가가 설문에 의해 좌우된다”, “설문 응답률이 낮아 평가의 신뢰성이 저하되고 있다”며 조사의 공신력까지 문제로 삼았다.

10년 전 취재수첩을 꺼내본 것은 당시 상황이 지금도 비슷하게 되풀이되고 있어서다. 최근에 금융당국을 뒤집어놓은 ‘우간다 사태’ 얘기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WEF가 지난해 한국 금융시장의 경쟁력 순위가 아프리카의 우간다보다도 낮은 87위에 불과하다는 발표를 내놨다. 8년 전 한국의 국가경쟁력을 11위로 평가했던 방식과 동일한 분석을 통해 내린 결론이었다. 이에 금융위원회는 즉각적으로 “기업인의 주관적인 만족도를 국가 간 비교해 순위를 매길 순 없다”며 거품을 물었다. 충분히 맞는 말이고 억울함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과잉반응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정반대 상황도 있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최근 한국의 금융수준을 6위로 평가하자 “국제 비교가 가능한 객관적인 지표를 광범위하게 이용한 것”이라며 한국은행이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한국 금융이 우간다에 뒤질 정도는 아니지만 세계 6위라는 성적표도 과분하다”는 건 전문가들이 다 안다.

정부가 불리한 통계를 폄하한 사례는 또 있다. IMF는 최근 “한국의 고소득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5%로 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이라는 보고서를 내놨다. 이에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객관적 지표에 기초해 볼 때 한국의 소득 분배는 개선되고 있다”며 “(IMF 보고서는) 객관성이 결여된 자료에 근거한 억지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실제로 유 부총리의 말처럼 통계청이 산출하는 소득 분배 지표는 최근 수년간 개선되는 모양새다.

하지만 유 부총리가 놓친 부분도 있다. 정부의 조사 방식은 고소득층의 응답률이 낮아 빈부격차가 실제보다 양호하게 나온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물론이고 통계청 스스로도 잘 아는 사실이다. 정부도 이런 약점을 보완해 2013년 신(新)지니계수를 추계했는데 한국의 소득 분배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권으로 나왔다. 당시 정부가 이 통계를 은폐하려 했다는 논란이 일었고 이후 한 번도 ‘신지니계수’의 추가 데이터는 공개되지 않았다. 한 나라의 경제 수장(首長)인 부총리가 이런 사정을 몰랐을 리 없다고 본다. 만약 몰랐다면 그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위해 일부러 한쪽 눈을 감아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강조하고 불리한 것을 감추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일부 부도덕한 협잡꾼이나 장사꾼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다. 하지만 적어도 정부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으로만 반응해서는 곤란하다. 좋은 평가가 나오면 또다시 정부 입장이 바뀔 것이라는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지금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자기 방어에 치중하느라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다면 더 큰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유재동 경제부 차장 jarrett@donga.com
#유재동#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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