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마음대로 그림을 그렸더니 그대로 옷이 되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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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산기술硏 스마트의류기술센터의 이색 협업

6일 스마트의류기술센터에서 최희정 디아우스 대표(왼쪽)와 센터 마대천 부장이 작업지시서를 보며 의견을 나누고 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제공
6일 스마트의류기술센터에서 최희정 디아우스 대표(왼쪽)와 센터 마대천 부장이 작업지시서를 보며 의견을 나누고 있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제공
“젊은 디자이너들이 한번 오면 다 내 단골이 되지. 많이 가르쳐 달라고. 지금도 프랑스 유학생 한 명이 옆방에 와 있어. 나? 나도 젊었을 때에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꿈 많이 꿨었는데….”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마대천 부장(51)은 13일 여기까지 말하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19세부터 양장점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미싱 경력만 27년이다. “우주복만 빼고 다른 옷은 다 만들어봤다”고 한다. 서울 중구 신당동, 이른바 ‘동대문 봉제공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요즘 동대문에서 꿈을 펼치려 하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일을 하고 있다. 디자이너들이 ‘그림’을 그려오면, 그는 그걸 보고 진짜 ‘옷’인 시제품을 만든다.

○ “의류학과 나와도 봉제는 모른다”

현장에서 중소기업에 맞춤형 기술지원을 해주는 연구기관인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은 2002년부터 서울 중구 신당동 일대에서 직원 26명 규모의 스마트의류기술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 센터에서는 ‘동대문 출신’ 미싱사 10여 명이 기술 인력으로 일한다. 마 부장도 그렇고, 열일곱 살부터 양복을 배웠다는 신동식 씨(51)도 그렇다. 이 센터의 주 고객은 동대문에 근거를 둔 소규모 패션업체들이다. 젊은 디자이너 한 명이 운영하는 1인 업체이거나 5명 안팎의 디자이너들이 모여 만든 회사들이다.

“의류학과를 나온 디자이너들이 학교에서는 주로 예술만 배우다 보니 봉제를 잘 몰라. 그러다 보니 자기 스케치를 들고 시제품을 만들 때 고생이 많지.”

마 부장은 부자재 중 하나인 접착심지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소매나 옷깃처럼 원단과 원단이 붙는 곳에 쓰는 접착심지만 해도 수백 종류인데, 빳빳한 정도나 열에 버티는 정도, 탄력성이 다 다르다. 이 중 탄력성만 해도 탄력이 있느냐 없느냐, 수직·수평 방향으로 다 탄력이 있느냐, 한쪽 방향으로만 탄력이 있느냐 등 변수가 많다.

잘못된 부자재를 쓰면 옷이 형태를 못 잡고 늘어지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뻣뻣해져서 갑옷처럼 보이게 된다. 스케치를 그릴 때에는 상상만으로 허리에 고무줄이 들어가는 치마를 쉽게 그리지만, 이 스케치로 시제품을 만들 때에는 어느 정도로 두껍고 질긴 고무줄을 써야 할지 알아야 한다.

대기업 패션업체에 입사한 디자이너들은 그런 걸 몰라도 된다. 회사 안에 있는 샘플실에서 봉제 기술자들이 스케치를 보고 옷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품성을 중시하고 이미 브랜드 콘셉트가 정해져 있는 대기업 안에서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자기 마음대로 스케치를 그릴 수 없다.

○ 기술지원 믿고 과감하게 디자인

독립 디자이너의 길을 선택한 젊은이들은 반대의 상황에 부닥친다. 스케치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시제품을 만들기가 너무나 어렵다. 과거에 그들은 주로 서울 명동이나 동대문의 의상실에서 시제품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의상실 입김에 디자인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명동과 동대문의 의상실은 대개 시설이 열악하고 의상실 주인은 디자이너들의 구상을 충실히 구현하는 것보다는 ‘이 스케치가 대량 주문으로 이어질 것인가’에 더 관심을 뒀다. 부자재를 찾아 단추가게, 지퍼가게, 원단가게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은 여전히 디자이너들의 몫일 때가 많았다.
▼ 봉제고민 덜어주자 디자이너 상상력 커져 ▼

지난해 서울패션위크에서 ‘제너레이션 넥스트’ 디자이너로 선정된 1인 기업 ‘SUUWU(수우)’의 박수우 대표(43)도 그렇게 고생하던 젊은 디자이너였다. 벨기에 앤트워프왕립학교에서 패션디자인을 배운 박 대표는 “나는 스마트의류기술센터가 키운 디자이너”라고 말한다. 스마트의류기술센터에서 하루 만에 높은 완성도로 마칠 수 있는 일을, 혼자서 했다면 1주일이 걸려 높지 않은 품질로 겨우 마쳤을 거라는 설명이었다. 그는 지난해 일본·이탈리아 패션업체와 수출 계약을 했다. 박 대표는 “스마트의류기술센터를 알기 전의 저는 몇 가지 재료만 파는 상점에서 반찬거리를 사야 하는 요리사와 같았다”라며 “지금은 수천 가지 산지 재료와 요리하기 편하게 만든 반조리식품이 가득한 마트를 앞에 둔 기분”이라고 말했다.

이런 지원을 믿는 디자이너들은 더 과감한 상상을 펼 수 있게 된다. 직원 5명의 의류디자인컨설팅업체 디아우스의 최희정 대표(41)는 지난달 코르셋과 바지를 한 옷에 다 구현해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들고 마 부장을 찾아왔다. 몸에 딱 달라붙는 코르셋 소재를 바지와 접합시키는 방법이 문제였다. 두 사람이 개발한 ‘코르셋 바지’는 4월부터 홈쇼핑에서 판매된다.

○ “국산 명품이 봉제업계 도움 됐으면”

사설 의상실에서라면 손사래를 쳤을 난해한 디자인도 센터의 전문가들에게는 도전 과제일 뿐이다. 의류학과 출신의 디자이너와 미싱사 출신의 센터 기술자 사이에 만들어야 하는 옷의 스케치를 놓고 ‘즉석 브레인스토밍’도 자주 벌어진다. 자기 옷을 잘 설명하지 못하는 디자이너에게 미싱사들이 “이 부분은 어떻게 만들겠다는 거냐”고 물어보고, “이렇게 하면 더 낫지 않겠느냐”는 조언도 해준다. 신동식 씨는 조각조각 난 천을 엮어 벌집 같은 모양으로 옷을 만들겠다는 어느 의류학과 여대생의 구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느라 고생한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20∼30년씩 미싱을 해왔다고 해도 디자이너들의 상상력을 따라가려면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 마 부장은 2001년 처음 스마트의류기술센터에 왔을 때 퇴근 뒤에도 사무실에 남아 기계를 공부했다. 정장 재킷용 단춧구멍 재봉기, 모자 바람구멍용 재봉기, 초음파 웰딩기 같은 기계 70여 종을 분해하고 조립하며 활용 방안을 연구했다. 그는 봉제 없이 마감처리를 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 국내외에 특허도 출원했다.

마 부장은 디자이너들에게 “명품 디자이너가 돼 달라”는 말을 자주 한다. 세계적인 봉제 강국인 한국에 정작 명품으로 불릴 만한 유명 브랜드는 하나도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미싱사 공임이 1990년대 이후 거의 오르지 않았어요. 미싱사는 부부가 한 팀인 경우가 많아요. 경력 30년인 부부 미싱사가 하루 12시간씩 일해서 한 달에 버는 돈이 400만 원을 넘기가 힘듭니다. 두 사람 합쳐서 그렇단 말입니다.”

마 부장은 “명품 브랜드가 나오면 정성 들인 봉제가 필요할 거고, 그러면 미싱사들도 수입이 높아지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스마트의류기술센터#의류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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