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 창업후 3년간 법인세 면제… 글로벌 기업 속속 입주
세계 68국 연구인력 3만4000여명 ‘제2의 빌 게이츠’ 꿈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니스에서 칸으로 가는 A8 고속도로를 따라 20분 정도 달리면 야트막한 산속의 작은 도시가 눈에 띈다. 울창한 숲 속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3, 4층 건물이 띄엄띄엄 들어서 있다. 유럽에서 처음 만들어진 사이언스 파크, 소피아앙티폴리스다.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와 이 지역의 옛 명칭인 ‘앙티폴리스’를 합쳐 만든 이름이다.》
소피아앙티폴리스에는 세계 68개국에서 온 3만4000여 명의 연구개발(R&D) 인력이 일하고 있다. 프랑스텔레콤, 에어프랑스, IBM, 시스코시스템스 등 1276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이곳 기업들의 지난해 매출을 합치면 41억 유로(약 7조3390억 원). 작년에 낸 법인세만 5000만 유로(약 900억 원)에 이른다. 지난해 외국기업이 프랑스에서 투자한 R&D 프로젝트의 30%가 이곳에 유치됐다.
○ 3분의 2는 녹지… 한번 오면 안 떠나
소피아앙티폴리스를 방문했을 때 ‘기업도시’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울창한 숲과 건물이 조화를 이뤄 휴양도시에 온 듯했다.
이런 쾌적한 환경이 유지될 수 있는 비결은 개발 초기부터 전체 면적의 3분의 2는 녹지로 보존한다는 원칙을 세워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소피아앙티폴리스 투자개발청(SAEM)의 터를 구입하는 기업에도 그대로 적용한다. 예컨대 건축면적으로 100m²가 필요하다고 하면 300m²를 사도록 해 나머지 200m²는 정원 등으로 활용토록 한다. 단, 땅값은 건축물을 짓는 100m²에 대해서만 받는다.
자연과 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조망권을 보장하기 위해 건물 높이도 12m로 제한한다.
연간 300일 이상 맑은 날이 계속되는 천혜의 기후조건과 휴양도시인 니스와 칸을 끼고 있는 배후여건 때문에 한번 이곳에 온 사람들은 떠나려 하지 않는다.
영국에 본사가 있는 제약회사 NIPH의 아망 코셰 씨는 “실적이 안 좋으면 철수 명령이 떨어질지 몰라 본사에서 근무할 때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고 말했다.
크리스티앙 카브롤 SAEM 매니저는 “심지어 회사가 인수합병(M&A)된 뒤 철수 명령이 내려지자 이곳에 정이 든 직원들끼리 창업을 해 눌러앉은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 에어프랑스 유치 후 발전의 계기
소피아앙티폴리스는 1969년 피에르 라피테 박사가 “파리나 리옹 같은 대도시에서는 엔지니어들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낼 수 없다”며 숲 속에 과학도시를 짓자고 제안한 데서 시작됐다.
그는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에 이런 내용의 기고문을 보냈고, 과학교육을 강화하는 데 관심이 많았던 샤를 드골 당시 대통령과 생각이 맞아떨어지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이 이뤄졌다.
캠핑장과 사냥터였던 이곳을 1972년 ‘과학도시’로 탈바꿈시키긴 했지만 입주하는 기업이 없었다. 1974년 10월에야 ‘프랑랩’이라는 석유 관련 국책연구소가 처음 들어왔다. 개발을 끝내고도 2년 이상 기업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자 프랑스 정부가 국책연구소를 입주시킨 것이었다.
이후 소피아앙티폴리스는 파격적인 세제(稅制) 혜택 등으로 프랑스 항공사인 에어프랑스 전산센터를 유치하면서 발전의 계기를 맞는다. 이후 노텔, IBM,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등 글로벌 기업들이 속속 입주했다. 1969년 1850여 명이었던 소피아앙티폴리스의 인구는 올 8월 말에는 무려 21배인 3만9000명으로 급증했다.
카브롤 매니저는 “에어프랑스가 착륙하자 소피아앙티폴리스가 날아올랐다”며 “지역 발전을 선도할 수 있는 기업 유치가 기업도시의 관건”이라고 말했다.
소피아앙티폴리스는 ‘숲 속의 연구도시’, ‘지중해의 과학도시’로 불리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시(市)가 아니라 프랑스의 기초자치단체인 ‘코뮌’이다. 소피아앙티폴리스가 개발될 당시 개발예정 터가 코트다쥐르 주(州)의 5개 지방자치단체에 걸쳐 있어 어느 지자체로 소속시킬지가 쟁점이 되자 아예 독립된 코뮌으로 만들었다.
관리나 운영은 소피아앙티폴리스에 지분이 있는 5개 지자체와 상공회의소가 공동 투자해 설립한 SAEM이 맡는다.
○ 40년간 꾸준히 6850억 원 투자
소피아앙티폴리스에는 이곳을 벤치마킹하려는 세계 각국 방문객들의 발길이 1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
1980년대에는 일본이 많이 찾았고 최근에는 중국과 남미 국가들이 많이 찾는다. 한국에서도 지난해에만 지방자치단체 등이 20여 차례 다녀갔다.
세계 각국에서 이곳을 벤치마킹했지만 왜 ‘제2의 소피아앙티폴리스’는 나오지 않을까.
이 지역 투자진흥기구인 ‘팀 코트다쥐르’의 필리프 스테파니니 사장은 “발전에 필수적인 어떤 것이 하나 빠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피아앙티폴리스의 성공은 연중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 기후조건, 니스와 칸이라는 배후 도시, 니스 공항을 끼고 있는 편리한 교통 등 뛰어난 주변 환경 외에 중앙 및 지방정부의 과감한 지원이 어우러진 결과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프랑스 중앙정부와 코트다쥐르 주 정부, 지역 상공회의소 등은 지금까지 소피아앙티폴리스 개발에 총 6억 유로(약 6850억 원)를 투입해 기반시설을 건설해 오고 있다.
중앙정부는 R&D 비용의 30%를 비용으로 처리해 세금 감면 혜택을 주고 있다. 이곳에서 창업한 벤처기업에는 창업 후 3년간은 법인세를 100% 면제해 주고, 이후 2년간은 50%를 면제해주는 혜택도 있다.
SAEM도 기업이 R&D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일정 조건이 맞으면 연구비의 60%까지 낮은 이자로 지원한다.
소피아앙티폴리스=황진영 기자 bud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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