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24시]실속파 신세대②/‘환상’ 깨지고 잡무에 ‘쩔쩔’

  • 입력 2002년 3월 27일 18시 14분


대학시절 6개월이나 케이블방송 조연출로 인턴을 했다. 방송 아카데미도 다녔다. 취업난 속에서도 대기업 A사에 거뜬히 입사했다.

연수기간 3개월을 마치고 미디어팀에 배치를 받았다. 늘 TV에서 보던 멋있는 커리어우먼이 되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어려운 일도 척척 해내고, 기발한 창의력도 마구 발휘하면서….

그러나 이정민씨(22·여)는 전화 하나 제대로 못 받아 쩔쩔매는 자신의 모습이 ‘당찬 커리어우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내가 이렇게 할 줄 아는 게 없었나 싶고, 직장이 만만한 데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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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산 전문 중소기업에서 1년째 일하고 있는 김모씨(24)도 “명색이 전산학을 전공했는데 막상 실무에서 프로그램을 짜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고 털어놓았다.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데만도 시간이 빠듯하지만 아직 주요 업무를 맡지 못하다 보니 복사 청소 등 사무실의 잡무가 모두 막내인 그의 몫. 쏟아지는 잡무로 12시를 넘기기 일쑤인 그에게 “일을 왜 그렇게 오랫동안 붙잡고 있느냐, 요령 없이”라는 선배 직원의 핀잔은 야속하기만 하다. ‘샤프한 전문직 프로그래머’가 될 줄 알았던 환상은 깨진 지 오래.

커뮤니티 포털 다음의 직장인 동호회에는 “우리가 ‘시다바리’냐”는 새내기 직장인들의 푸념이 적잖게 올라온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정모씨(28)는 “동기 모임을 하면 ‘복사만 시킬 거면서 면접 때 토익 930 넘는지는 왜 물어봤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한다”며 볼멘 표정을 지었다.

부서 배치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한 대기업의 2년차 직원 이모씨는 해외홍보를 하고 싶었다. ‘해외에 한국 기업의 위상을 드날리리라’는 포부도 가졌다. 영어회화도 유창하게 하고 토익 점수는 900이 훌쩍 넘는다. 대학 전공도 신문방송학. 그러나 그는 행정지원 업무만 1년 넘게 하고 있다. 최근 인사 때도 부서를 옮기고 싶다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부서의 명칭을 보고 환상을 가졌다가 실망하는 경우도 흔하다. K씨는 증권사 영업 파트에 근무하다 적성에 맞지 않아 얼마 전 기획팀을 지원했다. 시장과 경제상황을 분석하고 그에 맞게 회사의 방향과 전략을 짜는 부서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런 건 제가 하는 게 아니라 사장님이 하는 것이더군요. 제가 ‘기획팀’에서 하는 일은 돈 나가는 것 비용 처리하고 문서 작성하고 그러는 거죠.”

새내기 직장인들은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다음커뮤니케이션 20대 직장인 동호회 운영자인 김영우씨는 “환상이 깨지지만 환상을 버리지는 않는다”며 “언젠가는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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