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전망대]신연수/빗나간 국가어젠다

  • 입력 2004년 10월 25일 17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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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이전은 한 시대와 지배권력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이런 큰 변화를 국민이 선택했고 그래서 때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한다.”(올 1월 29일 노무현 대통령)

“수도권의 집중된 힘이라는 것은 막강한 기득권과 결합돼 있다”(7월 8일 노 대통령)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결정으로 초상집이 된 정부 여당에는 미안한 얘기지만 대통령이 이런 말을 할 때부터 수도 이전은 물 건너간 듯하다.

사실 수도 이전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더라도 서울은 살기에 너무 팍팍하다거나 침체한 지방을 살리기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변에 많았다. 그런데 사안이 이데올로기 투쟁 비슷해지면서 ‘먹고살기도 힘든데 무슨 수도 이전’하고 돌아선 사람이 많다.

대명천지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이 국민을 기득권자와 비기득권자,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으로 나누는 나라가 또 있을까.

결국 ‘기득권자’들이 모인 헌재가 정권의 의지를 꺾었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헌재의 결정이 잘됐다는 여론이 60∼70%에 이르는 것을 보면 한국에는 기득권층이 대통령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모양이다.

기득권이라는 말은 이 정권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처럼 국민 대다수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나라에서 기득권층과 비기득권층을 구분할 수 있을까. 땀과 눈물로 보릿고개를 넘은 한국사회에서 지금 우리들은 누구나 얼마쯤은 혜택을 누리고 얼마쯤은 빈손이다.

수도 이전뿐 아니다. ‘가상의 기득권층’을 겨냥한 정권의 공격은 이어지고 있다. 사학의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해 사립학교법을 개정하고, 유력 신문사를 손보기 위해 ‘신문법’도 만들겠단다.

법안의 문제점은 둘째치더라도 이것이 과연 지금 국민이 절실히 원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한국의 교육에 희망이 없어 해외로 나간다는 사람은 수두룩해도 부패한 사학재단 때문에 자식을 못 맡기겠다는 사람은 별로 못 봤다. 또 언론에 공공성이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더라도 독자가 아닌 정부가 언론을 좌지우지해야 한다는 사람도 보질 못했다.

이런 것들이 올해 총선에서 승리한 정부 여당이 가장 먼저 추진하는 일들이라니 국가 어젠다 선정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지배세력 교체나 과거 청산은 혁명세력이 할 일이지 평화시기의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상대적인 깨끗함과 신선함에서 유리했던 선거 결과를 마치 혁명을 추진하라는 뜻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국민은 실생활과 동떨어진 거대담론을 놓고 계속 갈라져 싸우기를 원하지 않는다. 평범한 소시민들 대부분은 생활이 좀 더 펴고, 자식이 잘되고, 주변이 두루 편안하기를 가장 바란다.

이제는 한(恨)의 정치, 투쟁의 정치에서 벗어나 비전의 정치, 화합의 정치를 해주기 바란다. 이런 소시민들도 기득권층인가.

신연수 경제부 차장 ys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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