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전망대]허승호/한국재계의 이념좌표

  • 입력 2003년 4월 20일 17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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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스트증권의 SK㈜ 주식매집 사건이 정부의 대기업 정책에 대한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 자유기업원에서는 “자산 47조원의 SK그룹이 1700억원에 외국 펀드에 넘어갔다”며 “경영권 방어에 문제점이 노출됐으니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재계의 견해다.

반면 참여연대에서는 “경영 잘못으로 주가가 기업의 잠재가치 이하로 떨어질 때 적대적 인수합병(M&A)이 일어난다”며 “투명성 책임성을 기준으로 기업을 봐야 하며 자본의 국적성은 크게 문제가 안 된다”는 입장이다.

참여연대와 함께 진보진영으로 분류되는 대안연대는 생각이 좀 다르다. 자본의 국적성을 중시하는 이들은 “재벌들이 철저한 반성과 사회적 통제를 받아들인다는 전제 하에 경영지배권을 안정시켜줘야 한다”(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고 본다. 이 같은 견해들이 경제의 이념좌표에서는 어떻게 되는지 한 번 그려보자.》


사실 주주중심주의와 경영투명성을 기치로 내건 참여연대는 개혁적이라고 하지만 우익 쪽에 서 있다. 시장제일주의, 월가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에 이론적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다.

중간쯤에 서유럽식 자본주의가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기업시민(Corporate Citizen)으로서의 역할을 중시한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라 불린다.대안연대의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그림 왼쪽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있지만 거의 힘을 잃었다.

이렇게 보면 참여연대는 이론적 바탕이 매우 보수적이다. 소액주주운동을 펼치는 이들의 가치체계는 주주중심, 이사회 강화, 총수나 최고경영자(CEO)의 전횡방지, 선단경영 반대, 투명경영 등이다. 적대적 M&A에 대한 거부감이 적다.(본보 18일자 B3면 포커스 참조) 공정위도 비슷한 입장이다.

참여연대가 ‘개혁파’라 불리며 대기업과 대협각을 세우는 아이러니가 생긴 것은 우리 대기업의 왜곡된 모습 때문이다. ‘우리 재계가 더 우파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주무시, 총수독단, 편법지분거래 불투명, 선단경영 등 과거 폐습을 다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폐단은 서유럽식 자본주의나 월가가 모두 거부하는 대상이다. 서유럽 자본주의도 투명경영은 기본으로 깔고, 그에 덧붙여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추가로 요구하는 것이다. 자본의 국적성 논의도 이 전제 위에서 출발한다. 어쨌거나 국적성 대목에서 재계와 대안연대는 동상이몽(同床異夢)식 공조를 하고 있다.

규제 혁파를 주장할 때 우리 재계는 신자유주의자다. 그래서 전경련 산하에 자유기업원이 있다. 그러나 대주주의 전횡과 관련해서는 반(反)시장적 행보를 한다. M&A에 대해 거부감을 보인다. 가끔 대주주와 계열사간 편법지분거래 등으로 시장질서를 위배하는 일도 있다. 정체성의 분열이다. 이 때문에 우리 재계를 위 스펙트럼의 특정한 곳에 위치시키기 힘들다.

하루빨리 투명경영이 확산돼 대기업 문제와 관련해서도 시장주의와 대안주의의 실효성 있는 논쟁이 가능해지기를 기대해본다.

허승호 경제부 차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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