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수훈/국민은 어리석지 않다

  • 입력 2004년 3월 23일 19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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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살기로 싸울 이유는 없다’ 22일자 동아일보 ‘월요포럼’의 제목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정작 글 내용을 보면 죽기 살기로 싸우기를 작정한 사람은 그 글의 필자 자신인 것 같다. 글 전체를 꾸미고 있는 과격하고 파괴적이며 폭압적인 언어들이 그렇고, 촛불시위를 비롯한 탄핵 반대집회에 나선 선량한 시민사회를 ‘친북 반미 좌파’ ‘폭민’으로 몰아붙이는 대목도 그렇다. 포퓰리즘을 경계하고 통합을 강조한 글의 표면적인 취지와는 괴리가 있다.

▼盧정부 포퓰리즘 규정은 무리 ▼

탄핵정국을 맞은 우리 사회에 대해 ‘파괴적이고 시대 역행적인 광기로 가득 찬 포퓰리즘이 지배’하고 있다고 분석한 것은 온당한 현실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이후 포퓰리즘론은 일부 지식인에 의해 줄기차게 제기돼 왔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노 대통령이 때로 국민에 직접 호소하는 정치를 한다고 해서 이를 포퓰리즘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노 대통령 정부를 포퓰리즘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거니와 스탈린 통치나 파시즘, 페론주의 등과 같은 반열의 포퓰리즘으로 비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월요포럼’의 포퓰리즘론은 야당에서 제기한 ‘탄핵정국 음모론’과 ‘시민사회 선동 동원론’의 연장이자 그 종합판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국민을 얕잡아보는 우민(愚民)론이 자리 잡고 있다. 우민론은 정치 엘리트와 지식인들이 흔히 갖고 있는 인식인데, 야당 정치인들이 방송사 항의방문에서 한 언행에 그 정수가 나타난다. 즉, 순진하고 가만히 있는 국민을 편파 왜곡 방송이 거리로 내몬다는 것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을 비정부기구(NGO)로 위장한 좌파들이 조종하고 열린우리당이 선동 동원한 결과 대규모 탄핵 반대집회가 열린다는 것이다.

이는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은 물론, 집회에 참가한 시민을 모독하는 중대한 오류다. 한국 정치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견인하고 민주화를 추동한 주체는 언제나 시민이었다. 국민은 어리석지 않으며, 얕잡아 볼 대상도 아니라는 사실은 4·19부터 87년 민주화운동까지 우리 정치사가 생생하게 입증하고 있다.

오히려 어리석은 집단은 정치인들이다. 부패와 부실의 총체적 집단이 정치인이며,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 국민이 제일 불신하는 집단이 정치인들이다. 이번 탄핵정국을 몰고 온 야당 국회의원들이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즉, 여론과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탄핵안을 처리하는 절차도 미숙했으며, 탄핵안 처리 이후도 역풍의 원인을 깨닫지 못하고 남의 탓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70%의 국민이 탄핵에 반대하고 다수의 시민이 그 여론을 집회와 시위 형태로 표출한 것은 제도권 정치의 횡포에 대한 시민사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시민을 거리로 내몬 장본인은 노 대통령도 아니며 시민단체나 열린우리당도 아니다. 그 장본인은 터무니없는 사유로 대통령을 탄핵 소추한 193명의 국회의원이다.

▼일시적 진통 시민사회 성숙 과정 ▼

혼란과 무질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연일 집회와 시위를 하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위에 참여한 시민을 홍위병이나 전위대로 몰고, 우리 사회를 포퓰리즘이 지배하는 사회로 보는 인식이 더 무섭고 위험하다.

탄핵을 발의할 때 두 야당 지도부가 한 말대로라면 우리사회는 이 정도의 충격을 흡수할 만큼 성숙하다. 과연 맞는 말이다. 시민사회는 기본적으로 성숙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일시적인 진통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를 통해 결국은 더욱 성숙해 갈 것이다. 이 정도를 포용해 제대로 보지 못하고 파시즘, 포퓰리즘을 떠올리는 획일적이고 굳은 인식틀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수훈 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사회학

이 글은 22일자 ‘월요포럼’에 대한 반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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