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Digital]사기범 잡고 되레 고소당했던 이갑우씨

  • 입력 2000년 11월 2일 19시 35분


《국가 공권력이 시민을 보호해주지 않아 공권력에게 ‘배신’당한 시민이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나섰다면 그 과정에서 생긴 불법행위는 어떻게 될까. S기업 대표 이갑우(李甲雨·46)씨는 97년 8월 평소 알고 지내던 정모씨(42)에게서 사업자금을 지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씨는 이를 수락, 20억원의 약속어음을 줬지만 뒤늦게 정씨가 그 대금을 지급하지 않은 채 도망간 사실을 알게 됐다》

이씨는 같은해 9월 정씨를 고소하고 피해변제를 받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던 중 98년 4월 정씨를 찾아냈다. 근처 파출소에 급히 연락, 검거하는데는 성공했으나 “경찰서 수사과에서 조사중으로 현재는 해당 없다”는 이유로 정씨를 풀어줬다.

다른 파출소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불구속수사원칙’을 이유로 정씨를 풀어줬고 정씨는 곧 잠적해 버렸다.

정씨는 5월 구속영장이 청구됐지만 영장실질심사를 하는 법정에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다. 한달 뒤 다시 정씨를 찾아낸 이씨가 경찰에 급히 신고했다. 그러나 요란한 싸이렌 소리를 내면서 달려오는 경찰차를 본 정씨는 바로 도주해 버렸다.

정씨는 경찰의 무관심과 부주의로 계속 눈앞에서 사기꾼 체포에 실패하자 친척들을 동원, 정씨의 주변인들을 미행하는 등 직접 팔을 걷어부쳤다. 석달간의 추적 끝에 경기 양평군의 한 까페에서 정씨를 발견했다.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지만 “인력이 부족해서 현장에 갈 수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서너 군데 경찰서에 다시 도움을 청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씨는 고향 후배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리고 정씨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까페에 들어가 정씨를 끌어낸 뒤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로 경찰서에 인계했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술에 취해 순순히 따라왔던 정씨가 “1시간가량 차 안에 불법으로 감금당하고 폭행당했다”며 이씨를 고소한 것.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감금치상)혐의로 기소된 이씨와 고향 후배들은 결국 1심에서 모두 500여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이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항소심의 판단은 달랐다.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이종찬·李鍾贊부장판사)는 최근 “경찰의 무성의한 업무처리가 인정되는만큼 이씨의 행동은 사회통념상 허용되는 정당한 대응”이라며 1심판결을 뒤엎고 이씨 등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상고를 포기해 이 판결은 확정됐다.

재판부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경찰에 신고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씨의 행위를 법적으로 정당성이 인정되는 자구행위(自救行爲)로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20억원 이상의 거액을 뜯은 뒤 도주해 사전영장까지 발부된 정씨를 여러 차례에 걸쳐 경찰이 체포할 수 있었는데도 무성의하게 업무를 처리해 잡지 못했고 사건 당일에도 이씨가 여러 차례에 걸쳐 경찰서에 신고해 체포를 촉구했는데도 경찰이 별다른 성의를 보이지 않은 점 등을 감안할 때 이씨의 행동을 불법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갑우씨 인터뷰▼

“억울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에게 유죄가 선고된다면 더 이상 한국에서 살지 않겠습니다.”

경찰이 놓친 사기범을 직접 잡아 경찰에 넘겼다가 감금치상혐의로 기소된 뒤 벌금형을 선고한 1심판결에 불복, 항소한 이갑우씨의 법정 최후진술이다.

그는 “눈앞에서 사라지는 범인을 내버려두는 경찰에 마냥 기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고 말했다. “구속영장까지 청구된만큼 언젠가는 잡힐테니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는 경찰의 태도에 답답함과 초조감만 더해 갔다는 것. 결국 범인을 잡겠다며 밖으로 나돌다가 회사 문까지 닫아야 했다.

“혼자라도 범인을 잡겠다고 했더니 경찰관들이 ‘폭력만 쓰지 않으면 된다’, ‘잡은 뒤 4시간 안에만 경찰서로 데려오면 문제없다’고 조언까지 해 줬습니다. 제 행동이 불법이라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법을 잘 몰라 재판까지 받게 된 것은 억울하다는 주장이다. 검찰에 항변했지만 “감금죄처럼 큰 죄를 지은 사람을 불구속 수사하는 것만도 다행인 줄 알아라”는 검사의 반응에는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씨는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경찰이 성의껏 사건을 맡아줬더라면 내가 이렇게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며 한숨지었다. 그는 “경찰이 시민의 권리보호에 적극적이지 않는 그늘 속에서 고통받는 나같은 피해자가 아직도 많을 것”이라며 “공권력이 약자들의 억울함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지는 못하더라도 책임은 다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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