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감성의 보물을 가득 품은 도시 리스본

  • 입력 2016년 1월 25일 15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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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램의 낭만, 상 조르제성 바다경관, 땅의 끝과 바다의 시작인 호카곶, 제로니무스 수도원의 에그타르트에 흠뻑

#. 리스본 : 감성의 보물

무료 숙박에 눈이 멀어 한국인 운용 숙소에 대해 무료 블로깅을 해주다 여행 일정이 엉망이 돼 버린 ‘스페인 블로그 사건’ 이후, 유럽 여정을 다시 돌아보게 됐다. 잠시 내가 추구하려는 것을 포기한 채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대면하면서 내가 본질적으로 얻으려는 게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보게 됐다. 본질에 대한 망각은 헛된 욕구가 불러온 후회스러운 선택으로 돌아왔다. 단순히 새로운 곳에 대한 눈의 기억이 아닌 마음의 기억을 담겠다고 다짐하며 다음 여정지인 포르투갈로 향했다.

포르투갈에선 특별한 것을 지양했다. 그저 현지인들이 많은 곳에서 그들과 눈을 맞추고 그들의 생각을 읽었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니 시야도 넓어졌다. 특별한 곳을 방문해도 내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한계를 수용하면서 무리하지 않고 그곳만의 공기를 느끼게 됐다.

숙소를 나와 리스본 도심을 걸었다. 네모난 성냥갑 색상을 닮은 지붕과 가지런히 나열된 창문을 가진 알록달록한 집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메인 도로 주변은 비록 낡았지만 중세 궁전 같은 근사한 호텔들이 있다. 골목길로 접어들면 낙서인지 예술인지 구분되지 않는 페인팅이 자갈밭 도로의 깔끔함과는 대조되지만 이상하게 잘 어울린다. 그 사이를 낡고 오래된 트램이 끽끽거리는 소리와 함께 분주히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주택가 곳곳에 위치한 어느 식당에 들어가도 테이블별로 셋팅돼 있는 와인잔을 쉽게 볼 수 있다.

테이블 구석에 자리한 중년 신사의 모습이 보인다. 와인 한잔과 함께하는 소박한 저녁식사가 마치 일상인 듯 느껴진다. 그들의 삶과 배경이 부러운 것은 아니다. 단지 본능에 충실하는 순간만큼은 여유롭게 축복을 누리고 싶을 뿐이다. 여행 중 비록 혼자 먹는 음식이지만, 그들처럼 화이트와인 한잔과 함께하는 식사의 여유면 충분하다.

와인 한잔에 휘청거리는 몸뚱이를 이끌고, 도심산책에 나선다. 골목을 나와 호시우 광장(Praca do Rossio)으로 향한다. 광장의 타일 문양은 마카오의 세나두(Senado)광장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아 기분이 묘하다.

광장 분수 주변에는 많은 이들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고, 이런 저런 재주를 부리는 사람들이 길가에 종종 보인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문디알 호텔(Hotel Mundial)까지 걸어간다. 이미 그곳에는 트램을 타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섰다. 인기 있는 노선이라 몇 대를 그냥 보낼지도 모르지만, 트램에 올라타는 순간 이 정도의 기다림은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다.

28번 트램은 과거 리스본의 번영했던 구 시가지인 알파마 지구 언덕 곳곳을 통과하여 바이샤 지구와 바이루알투 지구까지 운행한다. 알파마 지구에는 대지진에도 끄떡없던 대성당과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맞은편 지구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상 조르제 성(Castelo de S.Jorge)’, 테주강의 경관을 보기에 적합한 ‘포르타스 도 솔 광장(Largo das Portas do sol)’이 있다.

걷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좁은 주택가 사이의 언덕길을 삐그덕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낑낑거리며 오른다. 아찔하게 주차된 차를 피하고 커브길에서는 맞은편 트램을 스치듯 지나간다. 마주 오는 트램의 승객과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을 정도다. 앞에 장애물이 있으면 어쩜 그리 앙증맞은 종소리를 울리며 귀여운 행차를 하는 것일까. 가끔 속도가 더디어 따라오는 트램이 꼬리를 물면 이 또한 장관이다. 문득 차창 밖을 올려본다. 파란 하늘에 놓인 거미줄 같은 선로가 묘하게 이국적이다. 내 피부를 스치는 바람의 향기와 눈에 담긴 하늘의 푸름이 솜사탕처럼 달콤하다.

1968년 사라진 서울의 노면전차가 아직 남아 있다면 어떨까? 과연 이곳의 풍경과 비슷할 것이라는 과한 상상을 하다가 삭막한 고층 빌딩 사이를 느릿느릿 오가는 모습이 썩 어울리지 않음에 고개를 젓는다. 이곳의 트램은 사라진 우리의 것을 떠올리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나 보다. 옛 종로에 머물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느낌이랄까? 혹자는 이런 나를 트램 애찬론자라 부를지도 모르지만, 여행 중 가장 이국적인 순간을 꼽자면 주저 없이 28번 트램을 타고 매일 리스본 곳곳을 누볐던 순간이다.

알파마 지구 언덕의 어느 트램 정류소에 내린다.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니 골목 곳곳에는 빛바랜 파스텔 톤의 집이 많다. 외관은 허름하지만 정겹다. 동네의 상점에서는 전통가요 파두(Fado)의 선율이 흐른다. 이곳에는 다른 유럽 지역에서는 기대했던 세련됨과 우아함은 없다. 하지만 정겨움이 느껴지고 나의 마음 또한 포근해 진다.

[TIP1] 도심의 트램
언덕이 심한 리스본을 둘러보기에는 트램이 가장 좋은 교통수단이다. 28E 트램을 이용하여 알파마 지구와 바이샤 지구의 에스트렐라성당까지 다녀올 수 있다. 25E 트램을 타면 바이루알투 지구를 둘러볼 수 있다. 코메르시우 광장을 둘러보고 근처의 15E 트램을 타면 벨렘지구까지 갈 수 있다. 교통카드로는 지하철 역사에서 비바카드(viva viagem, 1일 6€)를 구입해 지하철, 버스, 트램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리스보아 카드를 구매하면 약 30개의 유적지, 박물관을 할인 또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24시간(18.5€), 48시간(31.5€), 72시간(39€)권으로 구분되며 벨렘지구를 방문할 경우 48시간권을 구매하면 최소 본전 이상의 값어치는 있다. 리스보아 카드 관련 홈페이지는 www.askmelisboa.com이다.

도심에는 트램이지만 짧은 구간의 언덕을 오가는 지상 케이블카 ‘푸니쿨라’를 운영하는 곳이 두 곳 있다. 호시우 광장과 뒤편 지역을 연결시켜 주는 ‘글로리아’와 카몽이스 광장 주변의 언덕을 연결시켜주는 ‘비카’이다. 이들은 보통 30분정도의 배차로 운행된다. 글로리아를 타고 올라가면 전망대(상 페드루 데 알라칸테)가 있어 반대편 알파마 지구를 보기에 좋다. 또 근처에는 많은 레스토랑과 바, 공연장이 몰려 있다. 리스보아 카드로 탑승이 가능하며 푸니쿨라 티켓을 사기에는 비용(3€)이 조금 아깝다. 가파른 경사를 거북이처럼 천천히 오르는 푸니쿨라의 속도는 걸어 올라가는 것보다 느릴지도 모른다. 체력이 되면 15분 정도 소요되는 길을 걸어올라 가며 그래피티된 동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좋다.

#. 신트라 : 마법의 성, 세계의 끝에서
로시우역에서 기차를 타고 40여분을 서쪽으로 달려 근교 도시 신트라에 도착한다. 산을 배경으로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호화로운 저택과 아름다운 궁전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동화 속 마을이다. 이곳은 타고난 자연환경이 인간이 만든 건축물과 훌륭히 조화돼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역 앞에서 435번 버스를 타고 ‘헤갈레이라 별장(Quinta da regaleira)’ 앞에 내린다. 백만장자 ‘몬테이루’가 지은 대저택의 외관은 지독하게 중세 저택의 웅장함을 나타낸다. 옆으로 넓은 정원과 사이를 흐르는 수로, 인공으로 만든 지하 동굴과 폭포가 있다. 입구에서 받은 지도를 펼쳐 들고 숲을 지나 지하동굴로 들어간다. 무슨 의도로 과연 이 음침한 곳을 만들었을까? 원형의 나선계단과 비밀스러운 땅굴을 둘러보며 발칙한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높은 곳을 선호하는 나는 발길을 돌려 멀리 보이는 산중턱의 ‘무어성(Castelo dos Mouros)’으로 향한다. 7세기 무렵 이슬람 세력의 무어인들에 의해 지어진 이후 15세기 폐허로 남을 때까지 요새와 성으로 전략한 곳이다.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올라간다. 구불구불한 성곽의 계단을 오를 때마다 눈앞에 먼 리스본의 풍경이 채워진다. 해발 고도 450m에서 맞는 산들바람이 눈과 마음을 정화시킨다. 경관을 즐겨보는 이에게는 추천하지만 아쉽게도 특별히 쉬거나 사색할 만한 공간은 없다.

오른편으로 눈을 돌리니 밝은 파스텔 색상의 궁전이 눈에 띈다. 16세기 수도원을 개조하여 세운 페나성이다. 로맨틱한 모습의 궁전은 이국적인 장식과 둥근 탑을 가지고 있어 여성 여행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그만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꼭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며 발길을 신트라 마을로 돌린다. 늦은 오후지만 마을 곳곳은 아직도 관광객으로 분주하고 길거리에는 공연을 하는 사람들로 여전히 활기차다.

호카곶(Cabo da Roca)으로 가기 위해 403번 버스에 올라탄다. 30여분을 달리던 버스는 종점에서 모든 사람을 내려준다. 잠시 찾아왔던 졸음을 한방에 날리는 시원함이 반긴다. 100m를 걸으니 바다가 눈에 차기 시작한다. 포르투갈 시인 루이스 바스 드 카몽이스(Luis Vaz de Camoes)의 시구 ‘이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문구가 새겨진 기념비가 홀로 땅 끝을 지키고 있다.

잠시 앉아 수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바다의 끝이 어딘지 종잡을 수 없다. 15세기 후반 유럽 대항의 시대를 열었던 그들처럼 저 수평선 너머 어딘가에는 우리가 모르는 세상이 있을 것만 같다. 마치 알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의 여정을 향해 떠나는 것처럼. 여행 중 장엄함과 웅장함에 사로잡혀 사진으로 감히 표출할 수 없는 곳이 있다면 호카곶도 그 중 하나다. 훗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와서 수평선 너머를 향해 목 놓아 소리치고 싶다.

누가 내게 유럽의 여러 도시 중 어디가 가장 좋았냐고 물으면, 모든 곳들이 새롭고 행복했지만 단언컨대 포르투갈의 리스본이 최고였다고 한다.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물가가 싸고, 크게 관광화가 되지 않은 면도 있지만, 유럽 서쪽 끝에 자리한 이 곳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 숨겨진 감성의 보물이 가득하다.

[TIP2] 벨렘 지구

벨렘지구는 테주강을 따라 서쪽으로 30여분을 이동하면 구성돼 있는 시가지다. 이곳에는 과거 탐험가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항해길을 떠나기 전 기도를 위해 들렀다는 16세기 건설된 ‘제로니무수도원(See Jeronimos Monastery)’과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용감한 선원들을 기념하는 범선 모양의 ‘발견기념비(Padrao dos Descobrimentos)’가 있다.

또 수도원 옆엔 에그타르트의 원조로 유명한 ‘파스테이스 데 벨렝(Pasteis de Belem)’ 가게가 있다. 그 시초는 수도원에서 수녀복의 풀을 먹이기 위해 사용하고 남은 노른자로 과자를 만든 것이었다. 1837년 오픈한 후 지금까지 연일 세계 곳곳의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바삭한 페스트리 속에 흘러내릴 듯 한 부드러운 크림이 가득한 맛은 어딜 가도 찾아보기는 힘들다. 나는 근처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며 먹다가 실수로 떨어뜨렸는데 탈탈 털어 다시 주워 먹던 본능에 새삼 깜짝 놀랐다.

글 = 장기백 여행칼럼니스트 eyebuso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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