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디팩트] 스페인, ‘알함브라궁전’속 이슬람 추억과 ‘히네랄리페’의 녹음 속 물·새소리

  • 입력 2015년 12월 22일 09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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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라나다 1 : 변화

스페인은 미술, 건축, 음식, 자연, 문화유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여행자를 충족시켜주는 나라다. 작년 한해에만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은 6500만명으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보다 많다.

모로코 북부 ‘탕헤르’에서 페리를 타고 스페인 남부 해안도시 ‘타리파’에 도착했다. 고작 한 시간을 이동했는데 유럽이라니 감회가 새롭다. 지체 없이 버스를 타고 ‘그라나다’ 로 향한다. 도심의 첫인상은 모로코의 세련됨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만든다.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들과 곳곳에 숨어있는 화려한 외관의 성당은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다. 보행자가 다니는 보도블럭은 깔끔하게 정돈돼 있어 마치 엠보싱 화장지를 밟는 듯 기분 좋게 만든다. 길가의 많은 바와 레스토랑에서는 웃음꽃을 활짝 핀 현지인들이 여유롭게 사치를 즐기고 있다.

문득 레스토랑 유리에 반사된 내 모습이 보인다. 후진국 위주로 여행을 다녀서일까? 아니면 자아성찰이라는 핑계로 외관에 대한 관심을 멀리해서 일까? 빛 바랜 티셔츠에 주먹 한 개는 들어갈 만큼 무릎이 늘어난 바지를 입고 부조화의 절정인 갈색 크록스(고무로 만들어진 샌들)를 신고 있다. 한 쪽 손에는 이집트에서 구매한 팔뚝보다 큰 오리발을 들고 있고, 등 너머 낡아진 회색 배낭 커버는 지금의 내 모습과 닮았다. 외모가 전부는 아니라며 매번 합리화했지만 이번에는 변화가 필요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구질구질한 행색 탓에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 어려웠던 상황이 많았다. 문득 이집트에서 밀입국자로 오해받아 짐 검사만 1시간여를 받았던 기억이 스친다.

시선을 돌려보니 유명 SPA브랜드(Special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 Brand, 기획·생산·유통까지 직접 맡아서 판매하는 브랜드)가 눈에 띈다. 서둘러 매장으로 들어간다. 옷값은 그리 비싸지 않지만, 가난한 배낭여행자의 주머니를 털기에 조금은 부담스럽다. 과감한 투자를 결심하고 총 50유로(약 8만원) 어치 티셔츠, 청바지, 신발을 구매했다. 이후 과감히 우체국으로 가 스노클링 장비와 짐을 모두 한국으로 보낸다. 손발뿐만 아니라 마음도 한결 가벼워 진 것 같다.

여행자에게 짐은 전생의 업보라는 말이 있다. 어깨를 짓누르는 짐의 무게만큼 여행자의 여정은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진다. 인간은 인생을 살면서 참으로 많은 짐들을 안고 산다. 하지만 정작 가방을 열어보면 하루를 살아가는 데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은 과한 욕심의 산출물이 아닐까? 가지지 않는다고 행복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 잠시 나의 것들을 조용히 정리한다.

# 그라나다 2 : 타파스에 취하다

깔끔해진 내 모습에 웅크러진 어깨가 펴진다. 이내 거리를 누비는 많은 이들의 행복한 미소도 눈에 들어온다. 그들과 함께 나도 스페인의 밤을 즐길 차례다. 곳곳에는 크거나 아담하게 생긴 바가 많다. 이들은 카페라 부르기에는 다소 규모가 크고, 레스토랑 부르기에는 초라해 어떻게 정의내려야할 지 모호하다. 도시 건물의 화려함과는 상반되게 골목의 음식문화는 소박하기 그지없다. 골목의 유난히 웅성거리는 바로 들어간다.

나는 샹그리아 한잔, 일행은 맥주 한잔을 시켰다. 주문한 음식은 소박한 자태를 드러낸다. 술과 함께 곁들여 먹는 작은 접시위에 담긴 소량의 음식 ‘타파스’가 주인공이다. 타파스는 특정 음식을 지칭하는 게 아닌, 두 입에 나눠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음식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1+1(원 플러스 원) 음식이다. 타파스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인심을 잘 드러낸다. 맥주 한잔에 하루의 여정을 풀고 담소를 나누며 과하지 않게 순간을 즐긴다. 단 2유로(약 3000원)의 투자가 이런 즐거움을 선사할 줄이야.

자리를 나와 2차로 향한다. 우리나라 회식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나는 2차라 부르지만 그들에게는 행복한 다음 여정지일 것이다. 다음 목적지에서는 어떤 타파스가 기다리고 있을까. 시간은 어느덧 밤 11시를 넘었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밤이 깊어졌음을 모르는 것만 같다. 밤 9시가 넘어야 해가 지는 이곳 특성 때문일까? 그들은 지구상에서 하루 24시간을 가장 길게 활용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몇 번이고 자리를 옮겨가며 맥주에, 즐거움에 취하다 보면 그라나다의 밤은 아쉽기만 하다. 여행자에게 맥주 한잔과 함께하는 타파스는 마치 습관처럼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정식이 아닐까.

# 그라나다 3 : 알함브라 궁전

알함브라 궁전은 그리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슬람 양식 건축물은 타국에서 많이 봤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전 예약이 필수라는 부분은 거부감을 더했다. 하지만 호스텔에서 만난 여행자의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겼다. “궁전의 미와 평온함은 기대 이상일 거야.” 귀가 그렇게 얇은 편은 아니지만 어느새 마음은 ‘이곳까지 와서 하루 정도 투자해도 괜찮다’며 내심 흔들리고 있다.

과거 알함브라 궁전은 8~15세기 말까지 약 800년에 걸쳐 무슬림이 정착했다. 이후 그리스도교 왕국들이 자리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궁전의 아름다움에 반해 훼손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는 유럽에 현존하는 이슬람 건축물 중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다음날 여행자라면 놓칠 수 없는 조식도 포기한 채 내 발길은 어느새 알함브라 궁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매표소 앞에는 이미 현장 구매를 위한 관광객들로 긴 줄이 늘어져있다. 1시간 반이라는 지루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입장이다.

우측으로 ‘헤네랄리페(Generalife)’ 가 보인다. 낙원의 정원이라는 뜻에 맞게 조용한 새소리, 물소리와 푸르른 녹음이 반긴다. 햇살이 포근함 마저 준다. 아치형으로 만들어진 정원의 나무들 사이를 오가며 과거의 그들이 느꼈던 것처럼 휴식처의 여유를 만끽한다. 발길을 나스르 왕조의 술탄들이 살았던 화려한 궁전으로 향한다. 나스르 궁전을 만나기 전 남쪽에 위치한 카를로스 5세 궁전(Palacid de Carlos V)에 잠시 들른다. 이곳은 알함브라와 크게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아마 이슬람 세력이 사라진 후 이에 대항해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잠시 내부를 살펴보는 것에 그치고 발길을 서둘러 나스르 궁전으로 향한다.

나스르 궁전은 술탄이 살았던 공간으로 현재는 3개의 궁으로 이뤄져 있다. 기대와 달리 궁전의 크기는 그리 넓지 않다. 이미 포화된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궁전의 방들을 돌아보며 정교하게 새겨진 벽들과 아치 장식들을 눈에 담는다. 특히 코마레스궁의 정원 내 연못에 비친 코마레스 탑의 그림은 인도의 타지마할과 흡사하다. 실제로 3세기 후에 이곳이 타지마할의 모티브가 됐다고 한다. 천천히 여유롭게 산책하듯 사색할 수 있었던 타지마할에 비해 이곳에서는 사진 한 장 남기고 도망치듯 복잡함에 떠밀려온다. 단지 정원 내에 흐르는 물소리만이 기타 연주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선율을 떠올리게 한다.

많은 인파를 피해 궁전 가장 바깥에 자리 잡은 성채 ‘알카사바(Alcazaba)’로 향한다. 이곳에서는 알함브라와 그라나다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알바이신 지구의 하얀색 벽과 붉은 지붕을 가진 집들을 보니 조금 전까지 가졌던 나의 불편함은 완화된다.
돌이켜보면 많은 관광객들로 불편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를 감내할 만큼 충분히 괜찮은 것들이 꽤나 있다. 하루의 시간을 투자해 여유롭고 천천히 둘러본다면 유럽에 잔재한 몇 되지 않은 이슬람 문화를 엿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다.



장기백 여행칼럼니스트 eyebuson@gmail.com
* 본 기사의 내용은 동아닷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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