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열심히만 산 당신에게 찾아오는 불청객, 번아웃 [최고야의 심심(心深)토크]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2일 0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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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피로·회의감…에너지 ‘제로’ 상태
직장인 10명 중 4명이 “난 번아웃”
직업 구분 없이 전 연령대 발생 추세
심해지면 우울증·공황 동반하기도
“자신 몰아붙이지 말고 ‘추앙’ 해줘야”


정신 건강, 정서 문제 등 마음(心) 깊은 곳(深)에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번아웃은 만성 업무 스트레스로 인해 몸과 마음이 탈진된 상태를 말한다. 최근에는 직업과 연령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대상에서 나타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정신이 육체에게 말했다. “네가 어떻게 해 봐. 이 사람은 내 말은 들어 먹지를 않아. 네 말은 들을지도 모르잖아."
육체가 정신에게 말했다. “그럼 내가 아파볼게. 그럼 이 사람이 너를 위해 시간을 낼 거야.”

독일 정신과 의사 클라우스 베른하르트는 저서 ‘어느 날 갑자기 무기력이 찾아왔다’에서 시인 울리히 샤퍼의 글을 인용해 번아웃(Burn-out) 증후군을 이렇게 설명했다. 정신력이 스트레스를 버틸 수 없는 한계에 이르면 마지못해 내리는 ‘비상용 차단기’가 번아웃이라는 것이다. 눈앞에 일을 스스로 멈추지 못하는 우리를 강제로 파업하게 만드는 심리적 원리다.

●“너무 열심히 살다 보니…”


번아웃이 오면 일과 학업이 유발한 스트레스 때문에 심지가 다 타버린 것 같이 지치게 된다. 주요 증상은 △퇴근 할 때쯤 되면 녹초가 된다 △일(학업)을 생각하면 무기력하고 짜증이 난다 △많이 자도 만성 피로에 시달린다 △두통ㆍ소화불량ㆍ생리불순 등 문제가 있다 △업무상 만나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 등이다

그래픽=안지현 anji1227@donga.com
그래픽=안지현 anji1227@donga.com


초기에는 번아웃이 고객을 상대하는 전문직 종사자에게 주로 나타난다고 봤지만, 현재는 직업과 관계없이 직장인, 주부, 학생 등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주로 책임감이 높고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이들에게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너무 열심히 살아서 생긴 증상이다. 특히 전업주부는 가족 구성원을 위해 많은 부분을 희생하지만 뚜렷한 보상이 없어 번아웃에 빠지기 쉽다.

여론조사기관 마이크로밀 엠브레인은 번아웃 관련 설문을 수년에 걸쳐 반복 조사하고 있는데, 조사가 실시된 2014~2016년, 2020년 모두 직장인 1000명 대상 조사 결과 매번 40% 정도의 직장인이 자신이 번아웃에 해당한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픽=안지현 anji1227@donga.com

한국형 번아웃 증후군 자가 진단 문항 개발을 연구해온 박수정 인하대 스포츠과학과 교수는 “한국인은 특히 번아웃을 피로, 소화불량, 불면 등 신체적 증상으로 호소하는 특징이 있다”며 “외국의 번아웃 연구 시초는 근로환경에서 비롯됐지만, 한국에서는 유아부터 노인까지 모든 생애주기에서 나타나 는 것도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심지까지 타버려 재만 남은 상태

번아웃이라는 말은 1974년 미국 뉴욕의 의사 허버트 프러이덴버거가 병원 의료진들이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지쳐있는 모습을 보고 처음 사용했다. 심지까지 몽땅 타버려 불이 붙지 않는 상태를 묘사한 말이다. 그는 논문에서 번아웃을 ‘주어진 업무를 헌신적으로 수행했지만, 성과나 보상이 없어 회의와 좌절을 겪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40년 동안 번아웃을 연구한 크리스티나 마슬락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 심리학과 교수는 번아웃 유발 요인을 6가지로 정리했다. △과다한 업무 △업무 통제력 상실 △보상이 적거나 없음 △동료와의 관계(소속감 없음) △불공정한 대우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업무 등이다.

마슬락 교수는 “대부분의 기업에서 모든 직급의 근로자가 스트레스, 불안, (성과의) 과소평가를 느낀다”며 “피곤한 직원은 최선을 다하기보단, 최소한의 일만 하기 때문에 직원이 회사에서 불행하다고 느낄수록 생산성이 떨어져 회사는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된다”고 했다.
●치료가 필요할까? “우울증·공황 동반하기도”

WHO 제11차 국제질병분류(ICD-11)에 따르면 번아웃은 의학적 질병명으로 분류돼 있지는 않다. 당장 치료가 필요한 병은 아니지만, 업무 스트레스에 따른 만성 스트레스 증후군(syndrome)으로 본 것이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스마트폰이 방전되면 충전하지, AS센터를 가진 않는 원리와 같다”며 “번아웃은 스스로 상태를 인지하고, ‘나는 바보다, 유리멘털이다’라며 다그치는 것을 멈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방치할 경우 궁극적으로는 삶의 질이 떨어지고,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등이 함께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김진세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번아웃이라고 해서 반드시 우울증 등 정신 질환으로 발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우울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본인을 방치하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몰아붙여 악화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번아웃을 질병으로 인정하고, 장애연금 지급 등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다. 스웨덴, 네덜란드, 핀란드에서는 번아웃을 피로, 신경쇠약, 불면증, 현기증 등과 연관지어 질병으로 분류한다. 특히 가슴에 통증이 있거나, 불규칙적으로 심장이 뛰는 등 심혈관계 질환까지 동반된다면 치료를 권고한다.
●‘조용히 그만두기(Quiet quitting)’ 뒤에 숨은 번아웃

미국 애플 엔지니어 자이들 플린이 틱톡 계정에 올린 '조용히 그만두기(Quiet quitting)'라는 용어가 담긴 게시물은 조회수 350만회가 넘었다. 틱톡 화면 캡처
미국 애플 엔지니어 자이들 플린이 틱톡 계정에 올린 '조용히 그만두기(Quiet quitting)'라는 용어가 담긴 게시물은 조회수 350만회가 넘었다. 틱톡 화면 캡처




미국 애플의 20대 엔지니어 자이들 플린이 최근 동영상 플랫폼 틱톡에 ‘Quiet quitting’이라는 용어가 담긴 게시물을 올려 화제가 됐다. 그는 “‘조용히 그만두기’란 주어진 일 이상을 해내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갇히지 않는다는 의미”라며 “일은 당신의 삶이 아니다. 당신의 가치는 일의 성과로 정해질 수 없다”고 썼다. 이 게시물은 조회수 350만회를 넘기며 젊은 직장인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조용히 그만두기’는 조용히 퇴사하는 게 아니라, 출근은 하되 심리적으로 일과 거리를 두는 것을 의미한다. 맡은 일은 성실하게 하지만, 그 이상의 업무에는 과도하게 몰입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미국 구인 사이트 레주메 빌더(Resume Builder)가 실시한 최근 조사에서는 35∼44세 근로자 25%가 ‘조용히 그만두기’를 하겠다고 응답했다.

사실 ‘조용히 그만두기’는 한국에서 ‘워라밸’이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한 수 년 전부터 일어난 현상이다. 박 교수는 “특히 젊은층에서 ‘조용히 그만두기’ 열풍이 부는 이유는 번아웃 증후군을 포함해 (기성세대와) 개인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의 차이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라며 “기성세대는 이런 분위기를 재빠르게 수용하고, 신세대는 기성세대의 근로문화를 좀 더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자신만의 ‘셀프 멈춤’ 버튼 만들어야

번아웃 증상을 보이는 이들에게 쉬라는 말만큼 공허한 말은 없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말이다. 김진세 고려제일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번아웃에 빠진 사람은 스스로 멈추기 어려운 사람이다. 주변에서 '너 그러다 병난다'는 말을 그냥 흘려 들어선 안된다"고 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전문가들은 번아웃을 피하기 위해 ‘조용히 그만두기’처럼 일종의 ‘셀프 멈춤’ 버튼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억지로라도 쉬는 시간을 만들어 잠깐이라도 쉬라는 것이다. 지칠 땐 새로운 일을 벌이거나 책임을 맡는 것도 피해야 한다. 휴가나 휴학이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또 할 수만 있다면, 근본적인 스트레스의 원인을 제거하면 생각보다 급속하게 회복될 수 있다.

윤 교수는 “휴식에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단 10분이라도 잡담하기, 산책하기, SNS하기 등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능동적 휴식이 필요하다”며 “무엇보다 자신을 비난하기 보단 열심히 견뎌온 스스로를 ‘추앙’하고, 대견하다 여겨야 한다”고 했다.

생활 습관 면에서는 수면, 운동, 수분 섭취 등 건강에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무너져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일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24시간을 쪼개 쓰지만, 정작 식사나 수면이 불규칙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김 원장은 “사회적 성취와 인정을 원하는 건 본능적이지만, 건강을 저당 잡혀가며 이루는 성취는 오히려 위험하다”며 “결과보단 과정을 칭찬하며 성취 지향적 태도가 인생 전체를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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