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기만 있으면 로봇이 움직입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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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그로봇’ 만든 김호영 서울대 교수
야생 밀 씨앗 움직임에 영감 받아… 로봇이 공기 중의 습도 빨아들여
자벌레처럼 몸체 휘어지며 이동

김호영 서울대 교수는 습기만을 이용해 스스로 움직이는 로봇을 개발한 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로보틱스 25일자에 발표했다. 윤신영 기자 ashilla@donga.com
김호영 서울대 교수는 습기만을 이용해 스스로 움직이는 로봇을 개발한 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로보틱스 25일자에 발표했다. 윤신영 기자 ashilla@donga.com
“보세요. 손바닥 위에 올렸을 뿐인데도 꿈틀거리죠? 피부에서 나오는 습기 때문입니다. 이 기계는 습기만 있으면 움직입니다.”

25일 오전, 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서울대 공대 연구실에서 만난 김호영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가 손바닥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손 위에는 껌 포장지 한 귀퉁이를 오려둔 것 같은 작고 얇은 물체가 있었다. 모양은 다양했다. 길이가 2.5cm인 가는 띠에 다리가 두 개 달린 것도 있었고, 활처럼 휜 띠 여러 개를 이어서 어른 손가락 하나 길이의 뱀 모양으로 만든 것도 있었다. 손으로 들어봤지만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김 교수는 “일각에서는 ‘이게 로봇이라니, 나도 만들겠다’라고 말하지만, 이걸 만드는 데 4년 걸렸다는 것을 알면 깜짝 놀랄 것”이라며 웃었다.

김호영 교수팀이 개발한 하이그로봇. 습기의 양에 따라 마치 자벌레처럼 휘어지며 이동한다. 서울대 공대 제공
김호영 교수팀이 개발한 하이그로봇. 습기의 양에 따라 마치 자벌레처럼 휘어지며 이동한다. 서울대 공대 제공
이는 다소 허술해 보이지만, 엄연한 ‘기계’다. 폴리에틸렌옥사이드와 폴리이미드 등 흡습 성능이 매우 다른 두 재료로 나노섬유를 만든 뒤 각각을 얇은 판으로 만들었다. 그 뒤 두 판을 앞뒤로 결합시켜 몸체를 완성했다. 습기가 많아지면 흡습 성능이 높은 판의 길이가 늘어나며 몸체가 활처럼 휘고, 습기가 줄면 몸체가 다시 펴진다. 이를 반복하면 기계가 자벌레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이 기계에 ‘하이그로봇(흡습로봇)’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로봇의 움직이는 속도는 초속 6mm. 느려 보이지만, 최근 나오는 비슷한 무게의 작은 로봇들 사이에서는 가장 빠르다. 숱한 실험으로 재료, 모양, 길이 등을 최적화해서 로봇공학자들 사이에서 손꼽히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로보틱스 25일자에 소개될 만큼 인정받았다.

김 교수는 기계라는 단어의 선입견을 철저히 거부하기로 유명하다. 기계공학자의 연구실에 있을 법한 전기 모터나 볼트, 너트 같은 게 없다. 그 대신 피카소가 그린 추상화가 다섯 점 액자에 걸려 있다. ‘저게 그림이라니 나도 그리겠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단순하고 추상적인 그림이다. 그는 “계산이 복잡한 유체를 연구하다 보니 대상을 최대한 단순화해 계산하는 데 익숙하다”고 말했다. 피카소 그림과 단순한 그의 하이그로봇이 말과 겹쳤다.

책상 위에 있는, 엄지손가락만 한 유리병에 든 가냘픈 제라늄 씨앗도 그의 관심사를 잘 보여준다. 제라늄 씨앗은 셀룰로오스와 펙틴으로 된 부드럽고 작은 나선 모양으로, 야생 밀처럼 습기에 반응해 모양이 변하며 나선이 풀어졌다 조여지는 움직임을 반복한다. 이 과정을 통해 씨앗은 단단한 땅을 뚫고 들어가 싹을 틔운다. 이는 하이그로봇 개발에 큰 영감을 줬다. 두어 해 전까지 화려한 색의 제라늄을 연구실에서 키운 김 교수는 “식물과 친하지 않아 실험실로 화분을 옮겼는데 다 말라 죽었다”며 멋쩍게 웃었다.

식물과 친하지 않다지만, 그는 식물 전문가다. 정확히는 식물과 곤충에서 영감을 얻는 자연모사공학의 전문가다. 식물에 주목한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인 ‘가장 자연적인 기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학창시절 내내 ‘복잡한 것은 멋있어 보이지만 쓸모가 적다. 자연은 단순하지만, 100번 시도하면 100번 다 성공한다’는 말을 은사로부터 들었다”며 “자연을 일부러 흉내 내는 것은 아니지만, 단순하면서도 성능이 좋은 연구 대상을 찾다 보면 그곳에 항상 자연이 있다”고 말했다.

그 말처럼 그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와 결별하고, 작고 가볍고 부드럽지만 맡은 임무를 틀림없이 해내는 기계 쪽으로 눈을 돌렸다. 2015년에는 소금쟁이를 흉내 낸 점프 로봇을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고, 이번에는 습기에 따라 휘어지는 야생 밀 씨앗의 움직임을 흉내 내 기계로 개발한 것이다. 그는 새로운 종류의 기계인 만큼,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 예측하기 어렵다”며 “피부에 약을 바르는 등 의료 목적은 물론이고 작은 센서를 장착해 전장이나 환경오염 지역에 침투시켜 모니터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씨앗처럼 스스로 움직여 싹을 틔우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하이그로봇#김호영 서울대 교수#나노섬유#폴리이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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