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카더라 口傳’서 2000년대 ‘논리 비약형’으로

  • 입력 2008년 5월 6일 03시 00분


‘괴담’의 역사는 흔히 학창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여학생이 밤마다 교실 문을 열고 다닌다” 등등….

이런 아날로그 식 괴담은 1990년대 들어 PC통신 등을 타고 서서히 사회성을 띠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 전국에 확산된 ‘김민지 괴담’이 대표적.

한국조폐공사 사장의 딸 ‘김민지’가 납치돼 토막 살해당하자 사장이 화폐 안에 토막 난 딸의 시신을 그려 넣었다는 게 괴담의 내용. 10원짜리 동전의 다보탑을 돌리다 보면 탑 계단 부분에 ‘김’자가 나타나고, 100원짜리 동전의 이순신 장군을 거꾸로 보면 민지의 얼굴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괴담의 파장이 커지자 당시 조폐공사는 공식 해명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그때까지의 괴담은 출처가 불분명한 내용이 주로 구전(口傳)에 구전을 거듭하면서 생명력을 얻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인터넷이 대중화한 뒤 ‘카더라’ 수준의 괴담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때부터는 전문지식과 논리, 부분적인 사실에 근거한 ‘그럴듯한’ 괴담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인터넷형 괴담 중 하나는 지난해까지 유행한 한 동영상.

유튜브를 통해 퍼진 이 동영상에는 누군가가 돼지고기에 콜라를 붓는 모습이 나온다. 콜라가 고기에 스며들자 구더기로 보이는 기생충 여러 마리가 독한 콜라를 못 견디겠다는 듯 스멀스멀 밖으로 기어 나온다.

이 동영상은 축산 및 음료 업계 전문가들의 주장대로 조작된 것으로 결론 났으나 평소 △돼지고기는 반드시 완전히 익혀 먹어야 안전하고 △콜라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의 고무장화가 콜라 원액에 닿으면 녹아내린다는 게 ‘상식’으로 통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4년에는 이른바 ‘국민연금의 8대 비밀’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배우자가 사망해도 유족연금이 지급되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을 뼈대로 한 이 괴담으로 국민연금 납부 거부 움직임까지 일자 당시 모든 신문과 방송이 실태 취재에 나섰다.

괴담 내용이 정확한 사실은 아니었으나 취재가 계속되는 과정에서 국민연금 제도상의 일부 허점이 속속 드러났다. 국민연금관리공단이 연금 징수 업무를 주먹구구식으로 해 왔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한 계약직 연금 징수원이 “소득이 없는 자영업자에게도 연금 납부를 강요한 사실이 있다”는 양심선언을 하기도 했다.

올해 초 연예계를 뒤흔든 ‘나훈아 괴담’ 역시 연예계에 대한 대중의 ‘기본상식’에 기반을 둬 파괴력을 얻었다.

연예계 일부에 폭력조직이 연루돼 있다는 게 상식이었고, 남녀 연예인 간 스캔들도 당연시되는 분위기에서 한 가수가 오랜 기간 모습을 보이지 않자 그럴 듯한 ‘야쿠자 소설’이 탄생한 것.

이번 ‘광우병 괴담’ ‘인터넷종량제 괴담’ ‘상수도요금 괴담’ 등도 성향이 다른 정권이 들어선 뒤 설득력을 얻으며 다시 힘을 받고 있다.

인터넷을 이용해 일반인들을 표적으로 한 ‘생활형’ 괴담도 점차 일반화하고 있다.

강원 평창군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김모(50) 씨는 최근 예약 정원보다 5명이 많이 온 일행에게 추가요금을 받았다가 곤란을 겪고 있다.

이 투숙객들은 일단 김 씨의 요구대로 돈을 내고 주말을 지낸 뒤 서울로 돌아가 조직적으로 펜션 홈페이지와 각종 동호회를 옮겨 다니며 ‘펜션에서 해 준 음식에서 벌레가 나왔다’ ‘위생 상태가 엉망이었다’ ‘주인이 불친절했다’는 등의 글을 올리고 다닌 것.

이로 인해 이 펜션에는 손님이 뚝 끊겨 김 씨는 업종 전환을 고려하고 있다.

김 씨는 “그 일이 있고 나서 너무 분통이 터져 잠을 못 이루고 있다”며 “작정하고 만들어 낸 말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과거 ‘구전형’ 괴담은 하나의 ‘얘깃거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문지식과 그럴듯한 개연성으로 무장한 인터넷 시대의 ‘논리형 괴담’은 그대로 두면 사회 분열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데에 심각성이 있다.

나성엽 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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