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고 싶고 되고 싶은 과학기술인]<7>박성래 한국외대 교수

  • 입력 2003년 8월 26일 17시 47분


코멘트
과학기술인이 한국과학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박성래 교수. -사진작가 박창민씨
과학기술인이 한국과학의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박성래 교수. -사진작가 박창민씨
9월 11일은 민족의 명절 추석이다. 음력 8월 15일로 정했기 때문에 해마다 달력상의 날짜는 바뀌지만 이를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음력’ 하면 왠지 비과학적이고, 조상들이 대충 정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양력이 오히려 엉터리입니다. 우리가 사용해온 음력은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반영한 역법체계입니다.”

이미 1970년대부터 음력의 과학성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박성래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교수(63)의 말이다. 현재의 양력 체계는 단지 서양의 부활절 날짜를 맞추기 위해 정해졌을 뿐이며,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삼은 우리의 음력(태음태양력)이 훨씬 과학적이라는 주장이다.

역사학자가 과학을 논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금세 수긍이 간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캔사스대에서 과학사 석사, 하와이대에서 동양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과학의 역사가 바로 그의 전공이다.

박 교수는 과학사학자로서 전통과학에 대한 일반인의 오해를 끊임없이 지적해 왔다. 이런 노력 덕분에 1989년부터 음력설은 3일 연휴로 지정돼 민족 최대의 명절로 자리 잡게 됐다.

그런데 그는 내친 김에 ‘박성래 달력’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음력이 다소 불편한 면이 있는데, 춘분(3월 21일)을 1월 1일로 정하는 새 양력을 만들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쯤 하면 사람들 입에서는 웃음부터 터진다. 달력에 자기 이름을 붙이는 게 엉뚱해 보여서다. 그래서 대학 제자들은 그에게 ‘파파 스머프’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박 교수의 ‘농담’에는 항상 뼈가 있다. 전통과학에 대해 모두가 막연하게 수긍하고 있는 생각에 대해 늘 허를 찌르기 때문이다.

10여년의 유학 생활 후 귀국한 순간부터 그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과학사 분야가 황무지나 다름없는 시절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국가 체면’이 걸린 연구는 당연히 그의 주된 몫이었다.

1996년에 열린 제8회 국제동아시아과학사회의에서 박 교수는 “중국학자들이 측우기를 우리보다 먼저 만들었다고 주장한다”며 그 왜곡 내용에 반박을 가했다.

중국과학사책을 조사해보니 중국이 측우기의 원조국이고 이를 한국에 배포했다고 기술하고 있어, 국제학술회의에서 처음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왜곡된 역사가 고쳐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 외에도 박 교수가 주장해온 것은 한둘이 아니다. 일본 고대과학기술의 뿌리는 한반도이고, 피타고라스정리가 전래되기 훨씬 전부터 우리 조상은 동일한 내용의 구고법을 알고 있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미 그가 전하고 싶은 얘기는 여러 권의 책으로 나왔지만 아직도 그의 생각을 다 담아내는 못했다. 물론 과학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주장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박 교수는 과학자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현대 사회를 규정짓는 가장 큰 문화요소가 바로 과학”이라며 “연구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위치를 역사 속에서 가늠해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과학의 역사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유능한 과학자뿐 아니라 훌륭한 교양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김훈기 동아사이언스기자

wolfkim@donga.com

▼박성래 교수는▼

1939년 충남 공주 출생. 중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자 매형들은 법관이 되기를 권유했다. 하지만 자신은 ‘아인슈타인이 최고’라며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6년 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서 일했다. 1967년 미국 유학을 떠나, 캔사스대와 하와이대에서 석박사를 취득한 후 1977년 한국외국어대에서 자리를 잡았다. ‘과학사서설’(1979) ‘한국사에도 과학이 있는가’(1998) 등 30여권의 교양서적을 집필했으며, 과학기술부 정책자문위원, 한국과학사학회 회장, 한국저술인협회 부회장, 한국외국어대 부총장을 역임했다. 과학저술상(1989)과 대한민국 과학기술상(1990) 수상.

△좌우명=주어진 조건에서 열심히 살자

△감명 깊게 읽은 책=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인홀드 니버)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