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실제보다 무서운 가상현실…공포증 치료효과 탁월

  • 입력 2001년 11월 1일 18시 58분



서민우(62)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높은 건물을 올라가지 못했다. 4층만 올라가도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높은 곳에 사는 친척이 집으로 초청하면 걱정이 앞서 전날부터 잠을 자지 못했다. ‘고소공포증’ 때문이다.

서 씨는 공포증이 너무 심해 로열층 아파트를 분양 받고도 손해를 보며 낮은 층으로 바꿔야 했다. 5년 동안 병원에 다니며 약을 먹었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러나 요즘 서 씨의 가장 큰 즐거움은 높은 건물을 올라가는 것이다. 63빌딩과 남산타워 꼭대기층을 모두 올라갔다. ‘가상현실 치료’를 받고 난 후의 변화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아직 비행기를 타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상현실을 이용한 정신병 치료가 최근 주목받고 있다.

2∼3년 전부터 선진국에서 시작된 가상현실 치료를 국내에서도 한양의대 김선일 교수팀과 백병원이 지난해부터 시작했다. 고소공포증은 벌써 여러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데 성공했고, 올 들어 대인공포증, 폐쇄공포증 등 다른 정신병도 치료에 들어갔다. 환자가 공포를 느끼는 상황을 가상현실로 만들어 환자가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가상현실 기법은 특히 현실에서는 만들기 어려운 다양한 상황을 만들 수 있어 효과적이다.

서 씨가 대표적인 사례. 환자는 먼저 큰 선글라스가 달린 헬멧을 머리에 쓴다. 컴퓨터를 켜면 환자 눈앞에는 밖이 훤히 보이는 엘리베이터가 나타난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한층씩 올라간다. 고개를 숙이면 땅이 멀어지고, 고개를 들면 하늘이 점점 가까워진다. 환자가 딛고 선 판도 높이에 따라 흔들거리고, 귀에는 바람소리가 심하게 들린다.

기자가 직접 헬멧을 써 봤다. 속도감은 느껴졌지만 만화 같은 영상에 과연 환자가 공포를 느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환자였던 서 씨는 “처음에는 진짜보다 더 무서워서 뛰어 내리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올라가는 층을 높이다가 마지막에는 50층까지 올라가는데 성공했다. 물론 병도 깨끗이 나았다.

연구팀은 고소공포증에 이어 올들어 대인공포증 치료도 시작했다. 지난 8월 대인공포증용 가상현실을 개발해 최근 첫 환자를 받았다.

대인공포증 환자가 헬멧을 쓰면 대학생들이 앉아 있는 강의실이 보인다. 이번에는 환자가 교수다. 환자가 학생들에게 강의를 시작하면 학생들이 반응을 보인다. 강의를 잘하면 “우리 선생님 최고야”라며 박수도 치지만, 강의가 시원찮으면 “어휴, 썰렁해”라며 옆사람과 떠들거나 딴 곳을 본다. 강의실은 그래픽이지만 학생들은 진짜다. 옆에서 의사가 환자를 보며 반응을 입력한다.

우스워 보이지만 대인공포증 환자들에게는 결코 우습지 않다. 환자는 처음에는 눈도 뜨지 못했고, 학생들이 재미없다고 하면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학생이 반응하는 모습은 처음 시도했는데 무척 효과가 좋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물론 가상현실 치료는 기존 치료와 병행해야 한다.

가상현실은 공포증 치료뿐만 아니라 학생이나 운동선수가 집중력을 키우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권투 선수가 상대방이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섀도 복싱’을 하는 것처럼 가상현실 기법을 이용해 실제 상황을 만들어 훈련하는 것이다. 김 교수는 “곧 골프 선수를 위한 가상현실 훈련시스템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상연동아사이언스기자>dre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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